[미디어 비평] ‘용병’과 ‘우한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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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부산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오래전 필자가 어느 일간지에 미디어 비평을 기고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에는 프로야구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언론은 외국인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곤 했다. 그런데 어떤 언론에서든 외국인 선수들의 호칭은 늘 ‘용병’이었다. 용병은 고용주를 가리지 않고 돈을 받고 싸우는 병사를 의미하니까, 상당히 어감이 좋지 않은 단어였다. 프로 운동선수는 국적에 상관없이 능력대로 대우받는 직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용병은 낯선 외국인을 국내 선수와 별도의 잣대로 보는 차별적 용어였다. 당시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같은 용병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인 선수가 한국 팬들에게선 국가대표 같은 대접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대비는 더욱 두드러진다.

‘용병’ 표현, 편견·외국인 혐오 조장
‘우한폐렴’ 호칭에 정파적 시각 담겨
부적절 용어 남발은 언론 불신 낳아
정확한 단어 사용이 저널리즘 기본


해외에서 보면, 용병이란 용어는 자칫 한국인의 뿌리 깊은 외국인 혐오증을 드러내는 사례로 비칠 수 있었다. 필자는 기고문에서 언론의 용병 표현과 관련, 세계 10위권의 무역국가이자 국제교류의 중심부에 있는 한국이 아직도 심정적으로는 외국인을 우리와 구분되는 ‘타자’로만 여긴다는 사실은 부당하다고 지적하며 용어 사용의 부적절함을 짚었다. 그렇지만 며칠 후 기사에서도 외국인 선수들은 여전히 용병으로서 열심히 뛰고 있었고, 언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는 언론 보도에서 용어 사용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경험이었다. 언론에서 사용하는 호칭은 대상이나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때로는 문제의 해법까지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보면 용병은 우리와 다른 낯선 사람이고 우리 집단의 일부가 될 수 없으며,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도구적 존재를 의미한다. 이처럼 자극적인 호칭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편견과 감정에 호소하고 손쉬운 해법을 지칭하기에 흥미를 끌기에는 편리하다. 하지만 부적절한 용어 사용에 따른 부작용도 당연히 크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오래전 용병의 기억’을 환기시켜 주는 사례가 등장했다. 여러 언론은 이것조차도 자극적이고 정파적인 소재로 변질시켰다. 감염병을 지칭하는 용어부터 정파성에 따라 갈렸다. 특히 보수언론인 모 중앙지는 코로나19 사태가 지속되는 기간 내내 ‘우한폐렴’이나 ‘우한바이러스’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심지어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코로나19)’로 용어를 통일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명이 담긴 이 용어는 사건을 보는 정파적 시각과 해결책을 담고 있다. 코로나19의 근원은 발생지인 중국과 친중 정권이며, 중국과의 접촉 차단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모든 문제점의 원인을 특정 대상에 전가하는 것은 대중을 납득시키기에 너무나 손쉬운 방식이다. 하지만 용병 단어 사용처럼 우한폐렴이란 용어는 코로나19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특정 지역에 대한 무의식적인 혐오와 공포만 유도하는 섬뜩한 단어로 다가왔다.

물론 코로나19 확산기 동안 일부 언론의 어긋난 행보는 부적절한 용어 사용에 그치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뉴스는 정파적·선정적인 프레임으로 채색돼 사회 불안과 갈등을 부추겼다. 언론이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의학문제까지도 정파적인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지는 가운데 한국 정부의 방역대응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일부 언론의 보도는 곧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동안 꾸준히 추락하던 언론 전반의 신뢰도는 코로나19 보도로 한 번 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2019년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 언론은 조사 대상국 중 신뢰도가 5년째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중에는 ‘언론도 해외직구’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린다. 예상을 뛰어넘어 보수진영 참패로 이어진 4·15총선 결과 역시 일부 언론의 중국 혐오 프레임이 별 효력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한때 대통령 선거든 정치 의제든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던 언론의 영향력은 옛날이야기가 되었음을 사람들은 이제 절감하고 있다.

한국 언론의 위상이 급격하게 추락한 것은 따지고 보면 부절적한 용어 사용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언론인들의 필수서인 은 사소한 문제에서도 정확하고 중립적인 용어 사용을 습관화하도록 가르친다. 이제는 효력이 다한 과거의 관행에 집착하지 말고, 저널리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정확한 단어 사용에서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자. 언론의 본분은 가르치고 계몽하는 거창한 소명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전하는 소박한 작업에 있다. 판단은 시민과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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