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평 화물칸’ 생사 넘나든 고려인들의 비극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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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땅 / 김숨

김숨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은 1937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7만 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건을 소설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고려인들의 비극적인 디아스포라적 운명을 복원한 노력과 솜씨는 놀라운 점이 있다. 언젠가 써야 할 소설을 쓴 것이고 우리 소설의 시야를 넓힌 것이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꼼꼼하게 살피고 정리해 완성한 것으로 소설이란 이런 숭고한 작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연해주 17만 고려인의 강제 이주 사건
화물열차 갇힌 27명 이야기 통해 복원

소설은 한 달여 동안 3.5평의 화물칸에 갇혀 동토의 대륙을 횡단하는 27명의 이야기다. 남편과 헤어진 채 내?i긴 임신부, 몸이 불편한 노인, 호기심 많은 아이, 심지어 갓 태어난 아이도 있다. 열차 칸은 창밖도 내다볼 수 없도록 막아버렸고, 중간에는 아예 문에 못질까지 해버린다. 땀 냄새와 배설물 냄새가 뒤엉킨 동굴 속 같은 어둠에 갇혀 그들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게 원망스러워요.” “아, 인간요? 돼지와 다를 거 없는 인간요?”

좁은 화물칸에 한정되기 때문에 당연히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좁다. 그러나 27명 각자가 지닌 디아스포라의 사연은 기구하기 짝이 없다. “솔직히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조선인, 러시아인, 소비에트 인민...” 소설에는 열차 칸에 갇힌 이들의 숱한 대화와 말들이 채워져 있는데 나중에는 그 각각의 말들이 누구 것인지 흐릿한 의식 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이고 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것이다. 소설은 이 부분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러한 다성적 화법을 통해 고려인의 처절한 운명이 울림 있게 드러나고 있다. 소설에서는 이런 비장한 부분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또한 사건이 벌어진다. 긴 도정 중에 소변이 마렵다며 열차 밑에 들어간 노파는 열차가 급히 출발할 때 못 나와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 또 엄마 품에서 열병에 시달리던 젖먹이가 죽는 비극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전염병을 무서워해 아이의 시체를 열차 밖으로 던져버리라고 요구한다. “우린 살아야 해요.” “왜요?” “네, 왜요?” “살아 있으니까요.” “살고 싶잖아요.”

소설 에필로그는 담담하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해서도 죽는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산다는 것이다. 한 노인은 낙타 젖을 잘못 먹고 설사병을 만나 죽고, 시계를 매고 다니던 사내는 독사에 물려 죽는다. 반면, 젖먹이를 열차 칸에서 잃었던 부부는 다시 아기를 가진다. 그리고 임신부 금실이는 원주민이 던져준 염소젖과 빵을 먹고 간신히 기운을 차린 뒤 갈대밭에 들어가 아기를 낳는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새 생명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김숨 지음/은행나무/280쪽/1만 35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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