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피해자 선택’ 강요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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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언젠가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이때의 생존자는 성폭력 피해자를 의미한다. 피해자를 생존자(survivor)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했던 수많은 질문, “너 왜 거기 있었니(그러니까 네 잘못이야)”, “왜 저항하지 않았니(죽을 때까지 저항했어야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죽은 것처럼 살아)”에 대항하고, 그렇게 살아남은 것을 축복하는 의미라고 했다. 당시 취재에서 느낀 점은, 성폭력은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혼자서 감당하기보다는 사회구조적 범죄 피해로 객관화하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우리 스스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땐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또 무뎌졌다.

그로부터 수년 뒤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폭력과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피해자에게 쏟아지던 검증의 시선을 가해자를 더 검증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옮아가는 추세다.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는 피해자라는 존재다. 잘못은 가해자가 저질렀고, 정작 피해자 잘못이 아닌데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피해자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심지어 ‘안희정 성폭력 사건’ 때처럼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 사법적 단죄는 당연
피해자 바라보는 시선은 문제 없나

“왜 직접 나서지 않느냐”고 묻기 전
사회가 화답할 준비됐는지 물어야

문제 제기만으로 이미 대단한 용기
어떤 선택이든 피해자 뜻 존중해야


성범죄 피해자 문제를 다시 떠올린 건 ‘오거돈 성폭력 사건’ 때문이다. 엊그제는 강제추행 혐의를 받는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사전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됐다. 보수적인 법 특성상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나, “업무 시간 시청 집무실에 부하 직원을 불러 강제추행 했다”는 점에선 “중대한 권력형 성범죄”라고 할 만한데, “피의자가 범행 내용을 인정,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며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이다. 이로 인해 피해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불구속 수사가 무죄는 아니지만, 여성계나 시민단체 반발에도 알 수 있듯 ‘권력형 성범죄’라는 사안의 중대성을 재판부가 소홀히 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더 기가 막힌 건 이날 오 전 시장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드러난 ‘인지부조화’ 주장이다. 그는 “피해자 말이 다 맞고 성추행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으나 어떤 성추행을 저질렀고 어떤 말을 했는지 등 구체적인 혐의 내용을 확인하는 검찰 질문에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동안 성폭력 범죄에서 숱하게 보았던 심신미약(주취감형)의 다른 버전은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오 전 시장에 대한 단죄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공직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였으니 당연히 공직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법적 판단과 별개로 우리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피해자 심정을 얼마나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가이다. 오 전 시장의 직접적인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는 피해자는 지금도 “하루 15알이 넘는 약을 먹으며 수면제 없이는 한숨도 자지 못하는” 상태다. 그런데도 한쪽에선 말한다. 피해자가 떳떳하다면 왜 직접 얼굴을 드러내지 않느냐고. 피해자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냐고. 심지어 추가 피해자가 있다면 용기를 내서 이번 피해자와 연대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그럼, 반대로 묻자. 피해자의 용기에 우리 사회는 얼마나 화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고. 피해자의 문제 제기에 대한 의심은 늘 있었다. 피해자의 문제 제기를 어렵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후회하지 않을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던가 곱씹어야 한다. 피해자를 보호 중인 부산성폭력상담소조차 각종 고소·고발, 정보공개 요청 등으로 곤혹스러울 정도라는데, 하물며 개인은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김지은 씨는 한 인터뷰에서 ‘그때 그 일’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선뜻 하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고 했다. 이유는 다들 잘 알 것이다.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말로만 피해자 보호를 외치는 정치적 공방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위해, 왜 싸우는지 본질을 잊어선 안 된다. 장기적으로는 피해 입은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회복에 이른다고 하지만, 피해자마다 사정이 다른 만큼 우리가 강요할 순 없다. 이번 사건만 하더라도 피해자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 진술을 마쳤다. 피해자는 이미 대단한 용기를 냈다. 부산이 성평등한 사회로 한 걸음 더 다가서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다음은 우리의 몫이다. 피해자가 털어놓고도 후회하지 않고, 일상에서 생활하는 게 불편하지 않도록 사회환경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용기를 내지 않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조차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피해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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