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소아시아 기행] 리키아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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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 내서재 대표

주로 동지중해 해변을 잇고 있는 리키아의 길(Lycian Way). 이 길의 중간 지점에 ‘케코바’라고 하는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 숨어 있다. 고대 리키아연맹 시절 ‘테이미우사’로 불렸던 이곳은 수도 역할을 했던 파타라의 의회당에서 부근의 아페를라에, 아폴로니아와 공동으로 겨우 1표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꼬마 마을이다. 오늘날에는 여름 한 철 관광객을 받아들여 제법 북적대다가 가을이 찾아오면 다시 고즈넉한 해변 마을로 돌아가 조용히 겨울잠을 잔다. 작년 여름 어느 날, 여기를 베이스캠프 삼아 주위의 고대 유적지를 구경 다니다가 돌아오니 전방주시 태만 차량인지 음주 차량인지에 들이받힌 고압 송전탑이 쓰러지면서 내가 머물던 다락방을 강타하는 희귀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내가 철제 고압 송전탑 아래 묻히지 않고 살아남아 그때를 회상하며 글을 쓸 수 있는 건 간발의 시차 덕분이다. 그런데 이 마을 앞바다에는 정말로 바닷물 아래 묻힌 고대 도시가 있다.

캄란 인제라는 터키 출신 작곡가가 이 고대 도시를 회상하는 ‘리키아를 기억하며’라는 곡을 썼는데, 들을 때마다 수장된 도시의 애잔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보다는 이걸 초래한 난폭한 지진의 힘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의 작곡 포인트가 빗나갔거나 터키인 특유의 과장과 허세가 이 곡에도 배어들어 갔는지 모르겠다. 케코바를 떠올리거나 애도하기에는 악기의 왕인 피아노나 악기의 여왕이라 불리는 바이올린보다 음높이나 음색에서 어중간한 위치에 있기에 기고만장과 거리가 먼 악기인 비올라가 제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에서 활동한 벨기에 출신 바이올린 연주자 앙리 비외탕의 ‘피아노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B플랫 장조’(op. 36) 전 악장을 들어 보기를 권한다. 나는 이 곡이 ‘멜랑콜리’라는 감성을 위한 음악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앙리 비외탕 ‘피아노·비올라 소나타’
바흐 재해석한 타로·실로티의 연주곡
지중해 윤슬을 닮은 애잔한 감성으로
코로나19 재난에 지친 우울 달래줘

햇살이 지중해 바닷물에 반짝거린다. 햇빛 알갱이가 지중해의 잔잔한 파도를 받아 통통 튀어 오른다. 이걸 ‘윤슬’이라고 하던가. 지중해의 윤슬을 귀가 제대로 실감하게 해주는 악기로 그래도 피아노를 제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렉상드르 타로의 ‘오토그래프’ 음반에 실린 피아노곡들은 그가 본 연주를 끝낸 후 앙코르 요청을 받고 연주한 소곡들이다. 내가 듣기에, 이 곡들 모두 지중해의 윤슬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처음과 마지막에 배치된 바흐의 곡은 과연 윤슬을 탁월하게 인상화하는 음악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햇살과 잔잔한 바다 물결 사이의 무심한 듯 사랑스러운 유희를 이보다 더 뛰어나게 그려 내는 곡이 달리 있을까 싶다.

당시의 근무 계약 조건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바흐가 지중해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거나 그 바다를 직접 자기 눈으로 본 것 같지는 않다. 젊은 시절, 독일 북부 발트해에 연한 항구 도시 뤼베크의 작곡가 북스테후데에게 한 수 배우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의 길을 걸어서 왕복한 것 정도가 바흐가 다녔던 최장 거리의 여행이었을 거다. 그러니 바흐의 곡 중에 후대의 멘델스존이나 리스트의 경우처럼 바다나 곤돌라 등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없는 건 당연하고, 그의 곡을 그렇게 듣고자 하는 것도 바흐의 뜻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흐 같은 조직적이고 기하학적인 독일 음악마저 색채적이고 인상적으로 바꿔 버리는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게 되면, 이 곡에서 지중해의 윤슬을 떠올리게 되는 건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알렉상드르 타로나 같은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 안느 케펠렉의 연주는 눈이 부시도록 시린 지중해의 윤슬을 선물한다. 이건 아마도 프랑스가 지중해를 안고 있어서일 거라고 내 맘대로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알렉산더 실로티는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 연주 기교에만 매몰된 19세기의 전형적인 인물과는 달랐다. 리스트의 지도 아래 당대의 가장 다재다능하고 지적으로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한 실로티는 또한 바흐의 시학을 깊고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자신의 문화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실로티의 ‘바흐 사랑’이 맺은 아름다운 결실이 바로 ‘클라비어 소곡집’에 들어 있는 E 단조 ‘전주곡 5’를 B 단조로 섬세하고도 매력적으로 편곡한 것이다. 바흐의 ‘클라비어 소곡집’ 작곡이 갓 열 살을 넘긴 장남 빌헬름의 클라비어 연습을 위한 것이었다면, 실로티는 이 편곡을 자신의 딸 키리에네에게 헌정하였으며, 나아가 나에게는 지중해의 윤슬이라고 하는 뜻밖의 선물을 안겨 주었다. 나는 바흐가 작곡했으며 실로티가 편곡하고 지중해 감성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B단조 전주곡 5’(BWV 855a)를 들으며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우울과 의기소침을 떨쳐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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