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천박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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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라는 말을 처음 쓴 이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5~1920)다. 그런데 베버가 ‘천민’에 대응하는 단어로 선택한 ‘pariah’는 단순한 천민이 아니다. 인도 카스트의 최하위인 불가촉천민을 뜻한다. 손으로 건드려서도 안 되는 천하디천한 계층인 것이다.

중세 이후 근대로 넘어오면서 유대인들은 신흥 자본가로 등장했다. 베버는 그들이 돈 버는 꼴이 몹시도 역겨웠던 모양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주로 금융업(베버의 관점에선 고리대금업!)으로 자본을 축적했는데, 그의 눈에는 품격이나 책임, 윤리 따위는 없이 오로지 돈 놓고 돈 먹는 행태가 불가촉천민들이나 하는 더없이 천박한 짓으로 비쳤던 것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서울을 가리켜 “천박한 도시”라고 언급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세련된 문화가 돋보이는 파리와 비교하니, 아파트로만 꽉 차서 평당 얼마니, 얼마나 올랐니 하는 서울의 모습이 천박하게 느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10억 원에 분양받았는데 입주하기도 전에 15억 원이 넘었다”는 그런 말을 듣노라면 평소 아무리 부동산에 초연한 사람이라도 조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경우가 실제로 비일비재하니 ‘나만 홀로 무능한 건가’ 여길 뿐이다. 지금 한국에서 아파트는 부의 상징, 계급 차별의 본보기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돈 놓고 돈 먹는 수단이 됐다.

동서고금에서 부자 되는 길은 의롭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한 기독교 성경의 경고는 그래서 나왔을 테다. 하지만 그런 경고 따위 요즘 사람들에겐 그다지 두려운 게 못 된다. 저세상의 천국보다는 지금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사람이 많다.

우리 옛 문화에서는 불한당(不汗黨)을 짐승보다 못한 놈으로 여겼다. 불한당은 ‘땀 흘리지 않는 놈’이다. 노력하지 않고 이득을 취하려는, 불로소득을 노리는 자다. 지금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불한당의 욕망이 판치는 곳으로 전락했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부산에서도 수많은 아파트 집단들이 산과 바다를 성벽처럼 에워쌌다. 우리나라 웬만한 도시가 다 그렇게 욕망덩어리에 포위됐다. 그런 도시가 어찌 천박해 보이지 않겠는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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