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13. 오스트리아 빈 페스트조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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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에 유린당한 빈, 돌기둥에 새긴 극복의 역사

오스트리아 빈 그라벤 거리 한가운데 황금색으로 빛나는 페스트조일러가 서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중심지는 케른트너 거리와 콜 마르크트 거리를 이어주는 그라벤 거리다. 이곳에는 여러 관광지가 몰려 있고 괜찮은 식당, 카페도 모여 있다. 세거리를 지나 호프부르크 궁전까지가 비엔나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그라벤 거리 한가운데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 오늘은 이 기념비 이야기를 다뤄본다.

17세기 활발한 무역 거래 속 역병 확산
빈약한 상하수 시설, 보건 의식 부족
빈 시민 최대 12만 명 페스트로 숨져
레오폴트 1세, 의사 소르베 책임자 임명
페스트 척결 후 극복 의미 기념탑 건립
탑 꼭대기엔 ‘성 삼위일체’ 상징물 세워

■무역선 타고 날아온 페스트



1679년 빈의 여름은 매우 무더웠다. 찌는 날씨가 연일 이어졌다.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 여기에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역병이 발생한 것이었다. 페스트균이 날아와 빈을 휩쓸고 다니며 무고한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빈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항상 역병 발생에 취약했다. 빈은 다뉴브강변에 자리 잡아 동·서양 사이에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무역로가 감염 경로 역할을 했다. 페스트균을 가진 쥐들이 무역상의 배에 올라타 곳곳에 역병을 퍼뜨리고 다녔다. 쥐들은 빈처럼 인구가 많고 먹을 것이 많은 도시에 내려 재앙을 퍼뜨렸다.

게다가 빈은 매우 지저분한 도시였다. 그래서 역병 발생에 더욱 취약했다. 빈은 19세기까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아주 복잡했고 사람들이 붐볐다. 옛 기록을 보면 빈에 상·하수 시설은 없었다. 빈 시민들은 1553년까지 쇤브룬 궁전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길어 마셨다.빈 시내 거리 곳곳에는 쓰레기가 늘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역병을 몰고 다니는 쥐들은 이런 쓰레기만큼이나 흔했다. 창고에는 의류, 카펫, 곡류 등이 수개월씩 보관돼 있었다. 쥐들은 이런 창고에 서식했다.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역병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빈을 너무 더럽고 건강하지 못한 곳이라고 비난하면서 역병을 ‘빈의 죽음’이라고 불렀다.

역병은 처음에는 빈 외곽의 레오폴트슈타트 지구를 강타했다. 관리들은 역병을 가볍게 여겼고, 역병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숨겼다. 역병은 마침내 빈 성벽을 넘어갔다.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먹잇감을 찾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7만~12만 명 정도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 시청은 숨진 환자들을 수레에 태워 시내 외곽에 버렸다. 대형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버리고 불태웠다. 구덩이가 다 찰 때까지 버린 시체를 그대로 뒀다. 이것 때문에 감염이 더 확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1680년 설교가 아브라함 A 안타 클라라는 <로쉬 빈>이라는 책에서 ‘탐욕스러운 역병은 빈 거리 한 곳만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빈과 빈 주변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죽은 사람들이 실려 나가고 끌려나가고 묻히는 것뿐이었다’고 적었다. 시인이었던 아우구스틴은 “오! 내 사랑하는 비엔나여! 모든 게 사라지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이런 노래까지 유행했다.

‘매일이 축제로구나/역병이 마을을 휩쓰니/엄청난 시체의 축제로다/그것이 휴식이로구나.’

■소르베의 과학적 대응

역병 때문에 많은 빈 시민들이 쓰러지는 사이 황제 레오폴트 1세는 혼자서 빈을 탈출했다. 그를 태운 마차는 밤에 몰래 호프부르크 궁전을 빠져나가 프라하로 달아났다.

황제는 달아나면서 위생 전문가 겸 의사인 소르베를 총괄책임자로 임명했다. 또 역병이 물러나면 성모 마리아에게 ‘성 삼위일체 석주’인 ‘페스트조일러’를 만들어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페스트는 역병을, 조일레는 둥근 기둥을 뜻한다.

소르베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위생 전문가였다. 그는 과학적 방법으로 역병에 대처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는 고위관리와 위생, 환경 직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수도를 정화하고, 화장실도 청소해야 합니다. 거리도 청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역병 환자가 발생하면 절대 접근하거나 손대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 위생 당국에 신고하면 됩니다.”

소르베는 역병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도시의 위생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수도는 물론 화장실, 거리 등을 수시로 청소하면서 청결한 위생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역병 환자들만 다루는 특수병원을 만들었다. 역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은 시 외곽에 만든 거대한 구덩이에 넣어 불태웠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낙후한 대처법이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소르베에게 원군이 생겼다. ‘성 삼위일체 형제단’이라는 종교단체가 나선 것이었다. 그들은 어린이, 노약자를 위한 특별병원을 세웠다. 빈의 다른 공공병원보다 뛰어난 보살핌 서비스를 제공했다.

의사들은 환자들을 토약제, 사혈, 연고 등으로 치료했다. 소르베의 활약 등에 힘입어 역병은 조금씩 물러갔다. 2년 뒤에는 빈에서 역병 환자가 거의 사라졌다.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페스트조일러

황제는 빈으로 돌아왔다. 그는 역병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성모 마리아에게 약속한 대로 페스트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1683년 마티아스 라우치밀러가 황제의 명을 받고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천사상 일부만 만들고는 5년 만에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본 엘라흐가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았다. 조각가 토비아스 크라커와 요한 벤델, 다른 조각가 여럿이 힘을 합쳐 1693년 마침내 기념비를 완성했다.

페스트조일러는 그라벤 거리에 있다. 케른트너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길이다. 페스트조일러의 높이는 약 21m이다. 탑의 기단에 있는 조각은 질병에 대한 신앙의 승리를 상징한다.

조각의 중간 부분은 레오폴트 황제의 문양이며, 기도하는 황제의 모습을 담았다. 황제는 페스트조일러에 자신의 모습을 남김으로써 역병을 퇴치하기 위해 힘썼다는 이미지를 남기려고 했던 것이었다.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만든 천사와 다른 종교적 인물 조각을 세웠다.

페스트조일러는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나 성 삼위일체의 상징물을 세우는 석주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쟁 같은 극적 사건에서 살아남은 데 감사를 드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석주에 조각을 세우는 것은 원래 고대 로마의 전통이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황제 등의 조각을 석주 위에 세우곤 했다. 기독교에서 ‘성 삼위일체 석주’를 처음 세운 것은 10세기 무렵 프랑스였다. 그러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물결이 거셀 때 일반화됐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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