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미혜의 젠더렌즈]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양육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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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대 보건복지대 학장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피해 여성의 자립에는 주거 안정 외에도 자녀 양육과 경제활동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지지와 직업훈련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들의 미래는 ‘답이 없는 생활’이 반복된다. 다행히 여성가족부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위해 장·단기 보호시설과 단독 주거 공간 등을 제공하고 있다. 피해 여성은 폭력이 없는 주거 공간에서 자녀들이 더 이상 폭력에 노출되지 않고 밝게 지내는 것을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자신감이 생긴 경우에는 남한테 신세 지지 않고 자녀를 키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자녀 양육과 경제활동 병행 어려워
모성 신화 기대어 책임 여성에 전가
보다 더 강하게 미지급자 제재해야

그러나 자녀가 어린 경우, 일과 가정생활을 혼자서 책임지는 것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생활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들은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자녀 양육과 경제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또한 경제적인 이유로 이전만큼 자녀에게 못 해주는 경우 자녀에 대한 미안함을 나타낸다.

이처럼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자녀는 삶의 목적이자 고통의 근원이기도 하다.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피해 여성들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바람직한 모성’의 이데올로기를 내재하고 있으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이들을 버리지 않고 키우고 있다는 자긍심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자녀가 장성하여 양육의 책임이 거의 끝난 시점에서도 모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는 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미안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왜 그럴까?

모성은 사회적 구성물로서 정형화된 성 역할을 규정하고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우리 사회에서 모성에 대한 미화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강화되어 왔는데 이는 역으로 어머니에 대한 잘못된 기준을 제공하고 그 기준에 못 미쳤을 경우 오히려 어머니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아무 준비 없이 집을 나오는 과정에서도 자녀들의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이런 모성 신화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모성 신화는 이들 여성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동시에 힘든 생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들 대부분은 쉼터를 거치면서 자녀 양육을 도와줄 수 있는 주위 친척이나 지인들과 관계가 단절된 상황이어서 그 책임은 고스란히 이들 여성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혼한 한부모가정 중 양육비를 받지 못하는 비율은 2018년을 기준으로 대략 80%에 이르고 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양육비이행관리원이 지원한 양육비 이행 건수는 양육비 이행 의무가 확정된 전체 건수의 35.6%에 불과하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혼 후 한 푼도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남성을 실질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 규정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결국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여성들은 이혼 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전 남편의 신상을 공개하는 ‘배드파더스(Bad Fathers: 나쁜 아빠들)’라는 사이트를 개설하였다. 또한 한 여성은 양육비를 고의로 안 주는 전 남편을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하고 전 남편의 거주지와 직장, 구청, 경찰청 등지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이 사이트는 명예훼손으로 법적 소송에 휘말렸지만 개인의 명예보다는 아동의 생존권이 더 중요한 점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강제력이 없는 법 제도의 허점을 메꾸려는 여성들의 노력으로 지난 5월 말 양육비 이행 강화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다. 통과된 법안의 핵심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여성가족부 장관은 양육비 부담 의무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지방경찰청장에게 운전면허 정지 처분을 요청할 수 있다. 둘째, 정부는 양육비를 받지 못해 위기에 처한 가정을 우선 한시적으로 지원하고 나중에 국세 체납 처분에 따라 양육비를 징수하는 방안이다.

이렇게 강화된 양육비 이행법이 생겼지만 선진국처럼 더 강하게 미지급자를 제재하는 방안, 즉, 출국 금지, 명단 공개, 형사처벌 등은 아직 요원하다. 오죽하면 ‘양육비 미지급은 아동학대’라는 이유로 가정폭력으로 이혼한 친부를 고소한 중학생의 사연이 언론에 등장했을까. 양육비 문제는 결코 개개 가정의 일이 아니다. 가정폭력의 고통 속에서 가족 해체를 경험하면서도 자녀의 손을 놓을 수 없었던 피해 여성들에게 양육비는 자녀의 생존과 연관된 문제이다. 이들 피해 여성이 양육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제발 양육비를 받게 해주자. 이것조차 못한다면 양육을 직접 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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