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코로나 못지않게 답답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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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석 영산대 명예교수 전 대한일어일문학회 회장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이 좀 진정되는가 싶더니 다시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확산을 막기 위해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외출 후 손을 깨끗이 씻기 등이 일상생활화된 지 제법 오래됐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손 ‘세척제’를 손 ‘세정제’로 쓰고 있는 점이 코로나바이러스 못지않게 답답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언론매체뿐만 아니라, 굴착기를 만드는 제조업체의 홍보물에서까지 ‘굴착기’를 ‘굴삭기’로 잘못 쓰고 있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일본으로의 유학을 주선하는 유학원에서조차 ‘전형료’를 ‘선고료’로 잘못 쓰는 곳이 있으니 쓴웃음이 나온다. ‘첨단’을 ‘선단’이라 하고 ‘장애’를 ‘장해’라고 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이처럼 잘못 씀으로써 우리말을 왜곡, 변질시키는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일본과 한국의 한자 정책의 차이에 있다.

일본은 한자 사용을 제한하여 1946년에 ‘당용한자’라 하여 1850자를 선정해서 사용해 왔다. 그중에서 획수가 많고 복잡한 한자는 약자화했다. 1981년에는 여기에 사용빈도가 높은 96자를 추가, 보완하여 1945자를 ‘상용한자’로 제정하여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2010년에 여기에 다시 5자를 삭제, 196자를 추가하여 2136자로 확대 개정해서 사용해 오고 있다. 이름하여 ‘신상용한자(新常用漢字)’로서 이는 법령과 공용문서, 신문 잡지 방송 등 일반 사회생활에서 일본어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신상용한자’ 2136자에 포함되지 않는 한자의 표기는 ‘음이 같고 뜻이 유사한 한자로 바꾸어 쓴다’라는 대용한자(代用漢字) 정책에 따라 다른 한자로 바꾸어 쓴다. 이에 따라 굴착(掘鑿)→굴삭(屈削), 세척(洗滌)→세정(洗淨), 전형(銓衡)→선고(選考), 첨단(尖端)→선단(先端), 장애(障碍)→장해(障害) 등으로 쓰게 된 것이다. 물론 화살표 앞의 전자와 뒤의 후자는 일본어 음이 똑같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우리말을 왜곡, 변질시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처럼 일본은 일관된 국어정책 하에서 한자 사용을 강화하면서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의 한자정책은 ‘한글전용론’과 ‘한자혼용론’의 논쟁 속에서 수없이 많이 바뀌어 왔다. 1970년 이후 한자는 초·중·고교의 교과서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75년부터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자를 괄호 속에 넣어 보조적으로 표기하는 한자병용정책이었다. 현재 한자교육은 1972년에 제정된 한문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를 국어시간이 아닌 한문시간에 가르치고 있으며, 이것마저 학교의 선택에 따라 무시되는 등 학교에서의 한자교육은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제 점점 한자세대가 사라지고 한글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대용한자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스스로 우리말을 왜곡, 변질시키는 안타까운 사실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고 해도 한자에 대한 기본 소양이 없어 문제의식에 접근할 수가 없다. 이 또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질병 못지않게 답답하고도 안타까운 현실이다.우리 사회에 한자 실력을 겸비한 젊은 세대가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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