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원전, 태풍에 속수무책…외부전력 장시간 상실 땐 ‘방사능 유출’ 위험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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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마이삭이 부산에 상륙한 지난 3일 부산 기장군 고리원전 앞 바다에 큰 파도가 치고 있다. 김경현 기자 view@ 태풍 마이삭이 부산에 상륙한 지난 3일 부산 기장군 고리원전 앞 바다에 큰 파도가 치고 있다. 김경현 기자 view@

이달 들어 연달아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이 통과하면서 부산 고리원전(고리 1~4호기, 신고리 1·2호기)과 경주 월성원전(월성 2·3호기), 울산 새울원전(신고리 3호기) 등 무려 원전 9기가 영향을 받았다. 이중 부산의 고리 1·2호기와 신고리 1·2호기는 외부 전력이 끊졌으며,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고리 3·4호기도 외부전력이 차단돼 비상디젤발전기가 기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리원전에서는 고리 1호기가 영구정지 상태고 고리 2호기가 정비 중이었지만, 정상 가동됐던 고리 3·4호기와 신고리 1·2호기 등 원전 4기(발전용량 3900㎿)가 한꺼번에 멈춰서 전력수급 차질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번 태풍으로 부산에서 적어도 원전 4기가 외부전력이 손실됐다는 점이다. 외부전력 차단이 핵연료봉이 손상돼 녹아내리고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는 ‘중대사고’의 첫 단추이기 때문에 사안이 심각하다.


비상전원도 끊기면 ‘대형 참사’로

부실한 송배전 설비 개보수 필요


■외부전력 상실은 중대사고 ‘시발점’


원자력발전소는 원자로에서 핵분열로 얻은 열로 전기를 생산해 외부로 보내기도 하지만, 역으로 외부에서도 전기를 공급받아 가동되는 구조다. 지진이나 태풍 등 자연재해로 외부전력이 차단됐을 때 이른바 ‘소외전원상실(LOOP·Loss of Offsite Power)’이 발생하면 원자로가 자동 정지하고 비상디젤발전기 또는 대체교류전원 등 비상전원으로 원전에 전기를 공급한다. 원자로가 정지해도 핵연료 내 방사성 물질들이 붕괴하면서 잔열이 발생하는데, 비상전원으로 이 잔열을 냉각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번에 외부전력이 끊어진 원전들이 모두 가동 중이었고, 단 1기라도 모든 비상전원의 기동이 실패한다면 ‘소내정전사고(SBO·Station Blackout)’로 이어진다. 소내정전사고가 장시간 지속된다면 원자로 잔열 제거에 실패해 최악의 경우 핵연료봉이 녹아내리는 ‘노심용융(멜트다운)’까지 벌어진다. 다시말하면 소외전원상실이 중대사고의 ‘시발점’이며, 소외전원상실 빈도나 기간이 증가할 수록 ‘노심손상빈도(CDF·Core Damage Frequency)’ 역시 가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1년 3월 일본에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다. 당시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저에서 규모 9.0의 강진이 발생, 원자로가 자동 정지되고 외부전력을 상실해 비상디젤발전기가 기동까지는 성공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진 뒤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면서 지하에 있던 비상전원과 보조냉각계통 해수펌프, 연료 탱크 등이 유실돼 소내정전 사태가 빚어진다. 결국 원자로의 냉각능력이 완전히 상실돼 △3월 12일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 수소폭발 △14일 3호기 수소폭발 △15일 2·4호기의 수소폭발 및 사용후핵연료 수조 화재 등이 발생해 방사성물질이 대량으로 누출됐다.

에너지정의행동 이헌석 정책위원은 “핵산업계는 원전 방사성 물질 누출 여부만 보기 때문에 이번 사태를 사고로도 취급하지 않는다”면서도 “다수호기 소외전원상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다행히 이번에도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고 강조했다.


■악몽의 고리 1호기 정전사고


물론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강도 높은 지진에 쓰나미까지 발생했던 가혹한 환경이었기에 중대사고라는 최악의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원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후쿠시마 발전소의 유형인 ‘비등경수로(BWR)’와 달리 한국에서는 ‘가압경수로(PWR)’를 사용 중이고, △비상디젤발전기 △대체교류전원 △이동형발전차 등의 비상전원을 준비해 중대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2012년 2월 9일 발생한 고리 1호기 정전사고를 고리원전 간부들이 은폐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부산일보> 보도. 자연재해도 아닌 사람의 실수로 발전소가 완전 정전이 돼 큰 파장이 일었다. 부산일보DB 2012년 2월 9일 발생한 고리 1호기 정전사고를 고리원전 간부들이 은폐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부산일보> 보도. 자연재해도 아닌 사람의 실수로 발전소가 완전 정전이 돼 큰 파장이 일었다. 부산일보DB

하지만 불과 10년이 채 되기 전인 2012년 2월 9일. 부산 고리 1호기에서는 자연 재해도 아닌 사람의 실수로 외부전력이 상실되고 비상디젤발전기 기동까지 실패해 발전소가 완전 정전이 되는 사태가 발생한 전력이 있다. 당시 고리 1호기에서는 보호계전기 시험 중 직원의 오작동으로 외부전력이 끊어졌다. 이어 비상디젤발전기가 기동돼야 하지만, 2대 중 1대는 수리 중이었고, 나머지 1대는 기동에 실패했다. 한수원이 불과 한 달 전에 점검했을 때만 해도 멀쩡했다던 비상디젤발전기였다.

천만다행으로 한수원 측은 발전소 완전 정전 뒤인 12분 만에 수동으로 외부 전력을 연결해 원자로 냉각기능을 회복했다. 만약 완전 정전 상태로 며칠이 지난다면 원자로의 엄청난 열을 식히지 못해 핵연료봉이 녹아내릴 수도 있었다. 더 경악스러운 점은 고리원전 간부들은 사고가 수습되자 원자력안전위원회 현지 주재관이 사고를 알지 못하도록 원전일지에도 ‘고리 1호기가 정상 가동됐다’고 허위로 기록하하는 등 사고를 덮었다는 것이다.


■노후원전 폐쇄로 위험 줄여야

반핵단체들은 이번 사태로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원전 다수호기 밀집지인 부산·울산의 안전도 태풍에 날아가버렸다고 주장한다.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가 완공되면 부산·울산에 모두 9기의 원전이 가동돼 원전 다수호기 고장 사태가 또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8년 10월 언론에 공개된 한국전력 연구용역서를 보면 고리원전에서 후쿠시마와 같은 중대사고가 발생할 경우 피해액수만 ‘2492조 4000억 원’에 이른다. 반면 일본 후쿠시마 주변 피해액은 2016년 기준 205조 원에 불과하다. 후쿠시마 원전 주변 반경 30㎞ 내 인구는 14만 명에 불과했지만, 고리원전 주변에는 350만 명이 살고 있다. 후쿠시마보다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동국대 에너지전기공학과 박종운 교수는 “후쿠시마 후속 조치로 원전에 대한 안전성을 보강했지만, 외부전원 등 송배전 설비는 자연재해에 여전히 취약하다”면서 “겪어보지 못한 자연재난이 올 수도 있지만 원전업계는 타성에 젖어 “안전하다”고만 되풀이하는 게 안타깝다. 그러다가 정말 큰 사고 나는 것이다”고 일침을 가했다.

부산환경운동연합 민은주 사무처장은 “잇따른 태풍이 통과하면서 원전 다수호기가 밀집한 부산·울산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면서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고리 2호기를 비롯해 설계수명이 만료되는 노후원전부터 순차적으로 폐쇄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황석하·곽진석 기자 hsh03@busan.com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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