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도서정가제로 본 책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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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인류 문화의 정수, 마구 찍어낸 공산품이 아닙니다

도서정가제의 취지와 목적을 뚜렷이 세우려면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도서정가제 개악을 반대하는 부산 동네서점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26개 서점 가운데 한 곳인 문우당서점. 정대현 기자 jhyun@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동네 책방이 사라집니다. 읽고 싶은 책도 사라집니다.” 지난달 말부터 전국의 작가, 서점, 출판·독서 단체의 연대 움직임이 심상찮다. 지역 문화의 실핏줄인 부산의 동네 책방 26곳도 비상대책위를 꾸렸다. 최근 불거진 도서정가제 논란의 배경을 살피고 책의 가치와 본질에 대해 짚어 본다.

출판 산업·동네 책방 보호 차원
OECD 대부분 도서정가제 시행
프랑스 ‘반아마존법’ 도입 주목
책, 새로운 미디어와 함께 발전
문화적 공공재로서 보호 필요성
전 국민적 공감대 뒷받침돼야


■갈등의 안팎

현행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때는 2014년 11월. 첫 재검토 시기였던 2017년 정부는 ‘현행법 유지’ 결정을 내렸다. 이후 3년이 흐른 지금, 두 번째 개정 시한이 오는 11월 20일로 임박했다. 정부가 ‘소비자 후생’이라는 명분으로 ‘현행법 유지’ 결정을 원점 재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민관협의체가 지난 1년간 16차례 걸쳐 어렵사리 도서정가제 유지에 관한 합의안을 마련했는데 정부가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한다는 게 국내 출판문화·서점계의 입장이다. 정부는 원점 재검토가 아니라 여론 수렴 과정이라고 했지만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한 것은 물론이고 책 문화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 배경에는 지난해 11월 도서정가제 폐지 국민청원이 도사리고 있다. 동의한 사람이 2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 청원은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지역 서점 몰락 △독서 인구 감소 △책값 상승 같은 폐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통계 수치는 그렇지 않다. 서점 숫자는 1996년 정점을 찍고 줄어들다가 2014년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감소 폭이 크게 완화됐다. 신생 출판사와 독립서점은 되레 늘어났다. 독서 인구가 감소한 것은 맞지만 정가제보다는 디지털 매체 환경 변화의 영향이 더 크다. ‘책의 해’인 2018년 정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서 장애 요인 중 ‘책값 부담’은 1.4%에 불과했다. 책값이 올랐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2015~2019년 연평균 도서 정가 증가율은 2.51%. 도서정가제 시행 전 5년간 증가율 5.08%의 절반 수준이다.



■출판 선진국들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6개 나라 대부분은 도서정가제를 시행한다. 프랑스·독일을 비롯해 북유럽의 출판 선진국들은 할인을 규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도서정가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자국의 출판 산업과 동네 책방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1981년 도서정가제를 도입한 프랑스는 인터넷 서점들이 동네 서점을 위협하자 2014년 ‘반아마존법’을 만들었다. 동네 서점과 아마존이 같은 가격으로 책을 공급하도록 규제한 것이다. 할인이 없는데도 프랑스 국민은 책을 많이 산다. 2019년 서적 구매 중 온라인 서점 비율이 20%, 동네 서점은 22%. 우리나라(2018년 온라인 비율 53.1%, 동네 서점 10.6%)와 대조적이다.

독일 역시 온라인 서점과 동네 책방의 공급 가격이 차이 나지 않도록 국가가 관리한다. 독일 출판물정가법 제1조는 이렇다. ‘이 법은 문화재인 도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도 100% 정가제를 유지하고 있다. 동네 책방을 지키기 위해 일부 대학은 교내 서점조차 두지 않는다. 출판사, 서점, 저자, 독자 그 누구도 불만이 없다.

반면 중국은 도서정가제 채택에 실패한 뒤 지난 10년간 혹독한 아픔을 겪은 나라다. 온라인 서점들의 과도한 할인 경쟁으로 지역 서점과 출판사의 폐업이 속출했다. 할인이 일상화하니 신간이 팔릴 리가 없다. 지난해 소설 베스트셀러 톱 10에 신간은 하나도 없었다. 출판 생태계가 붕괴 직전에 몰리자 중국 정부는 이제서야 도서정가제 도입 논의를 서두르는 모습이다.



■“책은 문화 공공재”

전 세계 수많은 나라가 취하고 있는 도서정가제의 ‘철학’은 단 하나다. 책은 상품이 아니라 문화적 공공재라는 것. 책은 한 인간의 정신과 한 사회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정신적 가치에 참여하고 인류 문화의 정수를 체험하는 것과 같다. 한 권의 책에는 또한 무수한 사람들의 땀방울이 들어 있다. 작가의 창작 활동에 화가·편집자·디자이너·인쇄기술자·제본기술자의 노동력 등등이 합쳐진 결과물이 책이다. 책을 단지 ‘정보’의 전달 수단으로 보면 책값을 비싸다 여길 수밖에 없다. 책이 지닌 본질적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4세기 말 <고백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책 읽기는 개종을 이끈, 생의 결정적 장면이었다. 그 핵심은 ‘움켜잡음’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독서와 손의 관계를 상징한다. “책을 잡는 동안 책은 우리를 잡는다.”(앤드루 파이퍼 캐나다 맥길대 교수) 열고 닫는 물질적 형태의 발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 책장을 넘기는 손의 느낌과 감각, 책 전체를 감싸 쥐고 어느 부분을 찾는 뒤적임까지, 모든 것이 종이책의 매력이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작품 고유의 분위기, 즉 ‘아우라’가 이런 것이다.

물론 책의 물성이 책의 본질은 아니다. 책에 담긴 내용과 그것을 읽는 데서 가치가 발생한다.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할 때마다 책의 시대가 끝났다는 우려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책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미디어와 함께 발전해 왔다. 영국 소설가 이언 샌섬은 <페이퍼 엘레지>라는 책을 통해 종이책의 종말론을 비웃는다. 문자 전달이 커뮤니케이션의 원점이라는 것, 이는 곧 책의 무한한 생명력을 뜻한다.

책 읽기는 뇌과학적인 관점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읽기의 두뇌 원리는 ‘신경가소성’으로 설명된다. 쉽게 말해, 많이 사용하는 부분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것이다. “읽기는 시각, 언어, 인지를 이루는 두뇌 전반을 촉진시킨다.”(뇌과학자 메리언 울프) 여기서 읽기란 단순히 정보 습득 차원의 읽기가 아닌 근본적인 깊이 읽기, 사유의 깊이로 연결되는 읽기다.



■국회서 제대로 된 논의를

도서정가제 논의는 이런 사유와 성찰, 해외 사례 연구들을 바탕에 깔아야 하지 않을까. 현행 제도에 손을 봐야 할 부분이 없지는 않다. 각 관련 주체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린 것도 사실이다. 일반 소비재처럼 공정거래법에 따라 책에다 시장 원리를 적용하는 문제는 전 국민적 공감대가 뒷받침돼야 한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정부와 청와대는 도서정가제 관련법 조항을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다. 합리적이고 투명한 논의의 진행자 역할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건수 위원 kswoo333@busan.com

◇도서정가제  

출판물의 할인을 규제하는 제도다. 출판사는 판매 목적 간행물에 그 정가를 표시해야 한다. 발행한 지 18개월이 지난 책은 출판사가 정가를 바꿀 수 있다. 판매자는 정가의 15%(가격 할인 10%, 사은품이나 마일리지 등 경제상 이익 5%) 이내에서 책을 할인해 판매할 수 있다. 무분별한 가격 경쟁으로 출판 생태계가 무너지는 위기를 막는다는 게 취지다. 3년마다 재검토 절차를 밟아 폐지·완화·유지 여부를 다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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