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현재 상황, 댓글 전투 시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재희 편집국 디지털에디터

말 한 마디의 위대함은 속담을 통해 알 수 있다.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의 거대한 힘은 현대에 와서도 그 위세를 잃지 않고, 사람을 살리기도 또 그 목숨을 앗기도 한다.

SNS 독자의 호소가 있었다. 그는 <부산일보> 영상 기사를 보고 의견을 담은 댓글을 달았는데, 자신을 지칭하는 악성 답글이 너무 많아 괴로웠다. 그 댓글을 지워 줄 수 없겠느냐는 문의였다. 제작한 지 수년이 지난 그 기사는 ‘동물권’과 관련한 논쟁이 제법 활발했더랬다. 살펴보니 말대로 인신 공격성 내용도 제법 있는지라 일일이 관련 댓글을 찾아서 지웠다. 댓글도 기사에 대한 의견이라 단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게 맞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는데 모른 체 둘 이유는 없었다. 웬만큼 댓글을 삭제한 이후에도 그는 또 민원을 제기했다. ‘본인을 지칭하는 듯한 나머지 댓글도 지워 달라’는 2차 민원에는 과하다 싶어 응답하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남아 있다.

언택트 시대 온라인 기사에 과도한 댓글
다양한 상황 존재해도 자기중심 주장만
열린 생각으로 최소한 상대방 배려해야

포털 사이트에서 연예인 기사에 대한 악성 댓글 넘쳐나고, 그 글을 본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자, 연예/스포츠 기사에 댓글을 없애는 정책이 생겨났다. 댓글은 온라인 이용자가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익명성을 악용하여 악의적으로 인신공격하고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나쁜 측면도 있다.

악성 댓글(악플)을 주로 달거나 퍼뜨리는 사람을 ‘악플러’라고 한다. 문제는 악플러들의 주장은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거나, ‘~카더라’식의 가짜 뉴스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원래의 소스 자체가 왜곡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언론의 잘못된 방향 설정이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최근 이일병 명예교수에 대한 기사가 많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남편인 이 교수가 외교부의 해외여행 자제령에도 불구하고 요트 여행차 미국으로 갔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 뉴스가 대부분이다. 이 비판적인 뉴스의 칼끝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중에 바뀌긴 했지만, 초기에 나온 일부 언론의 기사 제목을 보면 ‘고가 요트 사러 미국행’ 등 왜곡된 시각을 담고 있는 기사도 있었다. 요트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이 교수가 블로그에서 언급했다는 ‘캔터 51’ 요트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호화 요트가 아니다. 1990년 제작돼 30년 가까이 된 낡은 세일링 요트로 길이가 15m 정도 되는 배다. 지난해 연말 부산 해운대 앞바다에 등장해 화제를 모았던 수도꼭지 하나가 4700만 원짜리인 러시아 재벌 소유의 4163억 원짜리 슈퍼요트 A와는 차원이 다르다. 다만 ‘요트’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호화’ 선입견을 어쩔 수 없이 부른다.

부산에서 변호사 시절 해운대 앞바다에서 한때 개인용 딩기 요트를 즐겨 탔던 고 노무현 대통령도 취미가 ‘요트’란 이유로 정적과 비판 언론의 요릿감이 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요트’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호사스러운 이미지다. 서구에서는 요트를 호화 모터 요트와 세일링 요트로 분명하게 구분해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공격의 대상을 찾은 비판 언론은 장을 펼치고, 악플러들은 이 틈새를 파고든다. 하나의 사안에 대한 평가 때 무수한 변수를 인정하고, 복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게 올바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체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찾는다. 그래서 견해가 다른 사안에 대한 설득과 이해, 서로의 대화와 차이에 관한 관용은 치열한 댓글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추석 연휴를 달궜던 ‘가황’ 나훈아 콘서트를 둘러싼 위정자(?)들의 아전인수식 해석도 가관이었다. “살기 어렵다”고 하니 정권을 욕했다 풀이했고, 나훈아가 “힘냅시다”고 했더니 이번엔 정부 친화적이라고 좋아한다. 관전자들의 댓글도 맥락이 없다. “그럼 그렇지, 나훈아가 누군데”다. 나훈아는 누구 편?

글을 정리할 즈음 한 단어를 떠올린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취업·집값 등에서 절망한 청년들의 외침이다. ‘이칼망’(이번 칼럼은 망했다)을 외친다.

‘이 시국에 장관 남편으로서 해외여행을 간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내년에 69세가 되는 노인이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떠난 것은 존중되어야…” 정도로 말하고 싶었는데, 뚜렷한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댓글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연애편지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다. 보낸 편지를 매번 그녀의 어머니가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이후 편지 내용이 점차 ‘삼강행실도’를 닮으면서 그 연애는 폭망했다. 악플을 두렵게 여겨 갈피를 못 잡으며 글을 마친다. 누구는 ‘악플이 무플(댓글 없음)보다는 낫다’지만, 이번에 달릴 댓글을 결코 읽지 않으리라. 

jaehe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