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삶 위로하고 추억을 부르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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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덕 소설가

대중가요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생장과 소멸을 겪는다. 한 시기를 휩쓸고 풍미했던 양식이 다음 시대에는 맥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이즈음의 트로트처럼, 한동안 주류에서 밀려나 있던 장르가 어느 순간 화려하게 부활하여 대중문화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주로 중장년과 노년층에게 인기 있었던 트로트가 바야흐로 전 세대를 아우르며 대중의 환호와 관심을 받고 있다.

어떤 노래는 들을 때 원작자를 떠올리기보다는 예전에 그 곡을 자주 불렀던 누군가를 추억하도록 만든다. 올해 초 방영된 ‘내일은 미스터트롯’ 프로그램 결승전에서 임영웅이 ‘배신자’를 부른 것이나 정동원이 ‘누가 울어’를 선곡한 건, 그 곡이 각각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불렀던 애창곡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곁에 없고 심지어 이 지상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노래 한 곡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서를 끈끈하고 애틋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노래는 누군가를 추억하게 만들어
내 어릴적 기억 속 트로트 ‘짝사랑’
흥 오른 아버지가 부르던 그 노래

이미자 문주란 남진 나훈아 하춘화
구슬픈 노래들 들으며 감수성 훈련
한국인 애환 정서 녹아있는 트로트


내 기억 속의 첫 번째 트로트는 일제강점기에 고복수가 불렀던 ‘짝사랑’이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 출렁 목이 멥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약주를 드실 때마다 부르던 노래였는데, 최근까지도 제목이 ‘으악새’인줄 알았을 정도로 첫 소절의 인상이 강렬하다.

담장 안에 널찍한 마당과 화단과 텃밭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던 시절이었다. 밤중에 소음 때문에 깨어나 안방 문을 열어보면 아버지가 직장 동료 서너 분과 방안에 서서 아코디언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레퍼토리는 항상 똑같았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왼손과 오른손이 버튼과 건반 위를 바삐 오가며 주름상자를 오므렸다 폈다하며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분은 아버지의 동료이자 내 친구의 아버지였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말이 없던 분들의 놀라운 변신을 보고 경이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아버지들이 불렀던 노래는 한결같이 구슬프고 애절한 트로트 곡들이었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과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도 안방에서 자주 들려오던 노래였다. 지금 생각하면 서른 중반의 젊은 아버지들이 어찌하여 일제강점기의 이별 노래에 그토록 감정이입을 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그 시절 아버지들의 청춘을 위로한 게 트로트의 애상과 정한(情恨)이었던 것 같다.

한바탕 노래와 연주가 끝나면 아버지는 간혹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서 노래를 시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두둑한 용돈을 받을 수 있어서 한밤중의 난데없는 즉석 공연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과 나란히 아랫목에 앉아서 TV 프로그램을 시청했고, 덕분에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옥같은 명곡들을 놓치지 않고 감상할 수 있었다. 이미자와 문주란, 남진과 나훈아, 조미미와 하춘화의 노래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감수성을 훈련하기에 맞춤이었다. 즉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긴 하지만, 때때로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외칠 수 있는 변화무쌍한 특성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근현대사를 굽이굽이 통과하는 동안 트로트는 평범한 한국인들의 애환과 정서를 대변하는 가요가 되었다. 흥겹고 애달프고 구성진 가락과 노랫말 속에 여러 세대를 거치며 면면히 이어져온 공동체 정서가 녹아있다. 트로트를 들으며 코로나19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위로받는 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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