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한국이 싫어서>를 다시 펼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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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제사 때마다 이역만리까지 행차해야 했던 조상님들이 한시름 놓게 생겼다. 종손(宗孫)인 사촌 형이 멕시코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형은 한국을 떠나며 감사하게도 제사를 가져갔다. 제사는 잘 지낼 테니 걱정을 말라고 했다. 명절 때면 제사 지내는 영상을 꼬박꼬박 보내왔다. 지진이 나도 버티던 형은 코로나에는 두 손 들고 이삿짐을 쌌다. 멕시코의 코로나 사망자는 8만 명이 넘는다. 현재 고향 집에서 자가격리 중인 형은 동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집 앞에 자꾸 던져놓고 간다며 웃었다.

코로나 덮친 2020년 세계사 변곡점
BTS·봉준호 각광 한국 자부심 상승
국내 돌아오는 해외 입국자도 늘어나

매달 평균 노동자 66명 산재로 사망
서울 생활은 각박 지방은 소멸 위기
다 함께 사는 나라 만드는 정치 해야


코로나 전 세계 확산으로 국내로 돌아오는 해외 입국자들이 늘고 있다. 추석 때 만난 후배는 초등학생 아이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되려던 계획을 접었다고 했다. 떨어져 살면 교포지, 가족이 아니라고 격려해 주었다. 서구 열강들의 코로나 대처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고, 특히 미국은 기가 찬다. 현재 확진자 814만 명에 사망자 22만 명으로 미국은 세계에서 코로나 피해가 가장 크다. 코로나 확진을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경호원들을 같은 차에 태우고 외출을 나갔다. 비록 지금은 음성 판정을 받았다지만 여전히 우려스러운 데도 마스크를 하지 않고 유세에 나가 “아름다운 여성들, 모든 이에게 키스할 것”이라고 했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다. 그는 지금도 ‘중국 바이러스’를 격퇴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로마제국’를 보면서 정치의 속성은 2000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탐욕과 환락에 빠져 지지도가 떨어진 지도자는 외부의 적을 공격해 인기를 만회하려고 한다. 무능한 지도자가 몰락하면 영원할 것 같던 제국도 쇠퇴하기 마련이다. 올 상반기 한인 가운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사람은 5816명으로 역대 최고였다. 지난해 하반기 444명과 비교하면 12배 이상 급증한 것이다. ‘아메리카 엑소더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올해도 두 달여 밖에 남지 않았다. 코로나가 삼킨 2020년은 후대에 세계사의 변곡점이 된 해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그동안 자연을 보전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던 사람들이 드디어,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지 모른다”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한다.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소까지 선보인 한국은 코로나 방역의 모범국으로 꼽힌다.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가 빌보드 글로벌 차트 정상권을 휩쓰는 일이 생전에 일어날지 누가 알았겠는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달성한 새 역사도 있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WTO 사무총장 최종 후보에 올라 있다. 우리에 대한 자신감을 찾고, 서구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원년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 장강명이 2015년에 쓴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생각난다. 이 책 주인공은 호주에 이민 가며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라고 했다. 세계 속 한국의 부상이 반갑지만 그새 개과천선해 완전히 달라지기는 어렵다.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목숨을 던진 지 50년이 지났다. 하지만 ‘노동건강연대’ 홈페이지에는 ‘김용균 죽었던 사업장에서 또, 9월 65명이 집에 못갔다’라는 부고 같은 문구가 걸려 있다. 올해 들어 9월까지 언론에 보도된 일 관련 사망자만 총 591명으로, 월평균 6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부산 4명, 경남 1명의 노동자가 포함했다. 부산항만공사 관할 부두에선 2015년부터 7명이 사망했다. 김용균 씨가 사망한 지 2년 만에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다시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 안전조치 위반 사항이 무려 377건이나 적발됐단다. 20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윤준호 의원이 발의한 ‘항만 김용균법(항만운송사업법 개정 법률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우린 안 바뀌었다.

거리에는 ‘임대, 권리금 없음’이라고 써 붙인 빈 점포가 널렸다. 자영업을 하는 지인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묻자 ‘존버’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단어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버텨내는, 우리들의 모습인 거겠죠”라는 안타까운 설명과 함께….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서울 아파트값이 52%가 올랐다고 한다. 서울 집값이 미친 듯이 오르니, 전세도 따라서 올라 품귀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직장을 찾아 서울로 몰려든 청년들의 집 장만이 어려우니,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은 꿈도 못 꾼다. 국가균형발전이 안 되면 지방은 소멸하고, 서울에서도 사람이 살기 어려워진다. 힘없는 노동자의 죽음이 더 이상 이어지도록 방관해선 안 된다.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다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그런 정치를 해달라.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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