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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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 소설가

소전 손재형은 진도 갑부 아들이었다. 그는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추사 김정희가 19세기 서예 대표라면 20세기 서예 대표는 소전이라고 할 만큼 그는 서예에 두각을 나타냈다. 수덕사의 ‘덕숭산수덕사’와 불국사 ‘관음전’ 편액 등도 소전 글씨다. 월간문예지 <現代文學> 제호도 그가 썼다. 소전 글씨가 우리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예가로서의 소전 명성은 생각보다 덜 하다. 오히려 그는 서예가보다 일본인 손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 온 것으로 더 유명하다.

소전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에 모인 많은 호사가들처럼 골동품 수집에 빠져든다. 그는 본정통(충무로, 명동) 주변에 모여 있는 골동 가게는 물론이고 남산 근처에 있던 골동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를 맴돌면서 안목을 넓히고 물건도 구입했다. 그러던 중 소전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경성제국대학교 교수 후지즈카 지카시 손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소장자 바뀌고 바뀌었던 세한도
돌고돌아 일본인 손에 들어간 뒤
하마터면 불에 타 사라졌을 뻔

손재형이 설득해 한국에 가져와
이후에도 주인 바뀐 명품의 운명
드디어 ‘국박’에 안착한 긴긴 여정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려주었다. 이상적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 김병선에게 물려주었고, 김병선은 아들 김준학에게 주었다. 김준학은 한말의 세도가 민영휘에게, 민영휘는 아들 민규식에게 물려주었다. 민규식은 후지즈카 지카시한테 넘겼다.

후지즈카 지카시는 추사 김정희를 흠모해, 북경과 경성의 고서점과 골동상을 돌면서 추사의 그림과 글씨는 사 모았다. 그리고 그는 1943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소전은 가방에 돈다발을 꽉 채워 후지즈카 지카시를 찾아 도쿄로 갔다. 후지즈카 지카시 앞에 무릎을 꿇고 세한도를 달라고 사정했다. 돈은 달라고 하는 대로 준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소전은 물러나지 않았다. 몇 달 계속 후지즈카 집을 방문해 그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세한도를 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후지즈카 지카시는 소전에게 세한도를 한 푼도 받지 않고 그냥 넘겼다. ‘내가 졌다.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고 하면서. 소전이 세한도를 찾아온 석 달 뒤에 후지즈카 집은 폭격을 맞아 집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불에 타 사라질 뻔했던 세한도를 소전이 구한 거나 다름없다.

그후 소전은 국회의원 출마를 하면서 많은 재산을 까먹었다. 그는 재산을 다 날리게 되자 사 모은 골동품을 저당 잡혀야 했다. 저당품 중에 세한도도 끼어 있었다. 물건을 저당 잡은 고리대금업자 이근태는 소전이 빚을 갚지 못하자 세한도를 비롯한 저당 잡은 서화골동품을 개성의 인삼무역상 손세기한테 팔아넘긴다. 손세기 선생은 개성의 거부였고 한 푼도 허투루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서화골동품은 손에 닿는 대로 샀다. 손세기 선생은 그렇게 사 모은 물건들을 서강대학교박물관에 기증했다, 세한도 한 점만 빼고!

세한도는 손세기 선생의 금고 안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왔다. 얼마 전에 손세기 선생의 아들 손창근 씨가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아버지 손세기 선생이 끝까지 품었던 세한도를 기증하기까지 많은 갈등을 했다고 한다.

세한도만큼 호사가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작품도 드물 거다. 추사와 이상적이 나눈 사제의 정을 언급하면서 염량태세의 비정함을 읽어내는 등, 호사가들의 평은 얼추 비슷했다. 이제 세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착하게 된 사연까지 보태져 소장 내역과 함께 이야깃거리는 더 많아졌다. 손창근 씨의 배포는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그 무게에 후지즈카 지카시의 통 큰 아량이 묻히면 안 된다. 후지즈카 지카시가 소전에게 세한도를 내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세한도가 어디에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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