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의 망각의 저편] 노천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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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추리문학관 관장

부산에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노천카페가 없다. 카페는 모두 건물 안에 자리 잡고 있고, 그래서 한낮에도 전등불 아래 앉아서 차를 마셔야 한다. 시내에 나가 어둠침침한 카페 안에 앉아 있노라면 으레 유럽의 노천카페들이 그리워진다. 왜 부산에는 유럽의 그 흔하디흔한 노천카페 하나 없을까. 한숨을 쉬다 보면 나는 어느새 파리 번화가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 양편에는 노천카페들이 즐비하다. 카페 앞 인도 한쪽을 점령한 채 노천에 자리 잡고 있는 탁자에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연인들끼리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다. 샹젤리제 거리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반드시 한 번쯤은 거쳐 가는 곳이기 때문에 지구상의 온갖 인종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파리 곳곳에 흐르는 낭만과 사랑
사람들 찾는 노천카페들이 매력의 핵심
여유 있게 걷고 음미하고 즐길 공간
부산 도심엔 왜 그런 카페 하나 없을까

나 역시 파리에 갈 때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샹젤리제 거리이다. 그 거리의 노천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개선문을 쳐다보기도 하면서 커피를 마시다 보면 비로소 파리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이를테면 샹젤리제 거리의 노천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이야말로 파리에 입성했다는 신고식인 셈이다.

굳이 이름난 곳들만 찾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녀도 파리에는 곳곳에 사랑과 낭만이 넘쳐흐른다. 어디에나 노천카페가 있고, 그래서 카페에 앉아 피곤한 다리를 쉴 수가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의 노천카페들은 그냥 일반적인 수준의 카페가 아니다. 파리 6구 생제르맹 데프레 거리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마고(Magots) 카페만 해도 1884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140년 가까이 되었다. 그곳에 드나든 고객들 가운데 몇 사람을 꼽아 보면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 보부아르,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피카소 등이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마고 카페에서 <이방인>을 집필했다고 한다. 카페 안에서 작가들이 앉아 글을 쓰던 자리 뒷벽면에 작가 이름이 동판으로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한마디로 문학과 철학, 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카페라 할 수 있다.

마고 가까이에 있는 카페 드 프롤르 역시 유명한 노천카페로, 철학자와 교수들 같은 지식인들이 많이 드나든다. 아무 때나 가 보아도 마고와 프롤르의 노천카페는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이 정지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들은 파리를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시가 아니라 음미하고 즐기는 도시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도시의 특징은 걷고 싶은 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걷고 싶은 거리가 많을수록 그 도시는 발전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부산에는 걷고 싶은 거리가 없다. 노천카페 하나 없는 도심의 거리는 여유 있게 즐길 공간이 없다 보니 거기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낭만스럽기는커녕 삭막하기만 한 도심의 거리는 그냥 수십 년째 방치되어 온, 아무 특징도 없는 단조로운 거리일 뿐이다. 걷고 싶은 거리가 있으면 당연히 머물고 싶은 거리로 변신하게 되고,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산의 거리에서는 그런 변화의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도심 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부산시의 수수방관과 안일한 대처에 있다고 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부산시는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걷고 싶은 거리 하나 만들지 못했을까? 아니,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우리한테는 과연 아름답고 철학적 배려가 느껴지는 거리 하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걸까?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바라는 것이 지나친 사치일까?

거대 도시의 번화가는 번잡하지만 그 번잡함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붙잡아 도심의 흐름을 음미하고 즐길 공간을 마련해 줄 유인책이 필요하다. 모처럼 도심까지 나들이 나온 시민들은 볼 일만 끝내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 도심의 거리가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노천카페 같은 곳에 앉아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그러지는 못할 망정 피곤함만 느끼다가 돌아간다면 상실감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 상실감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야만의 도시야. 먹고, 배설하고, 버리고, 그러다가 서로 욕하는 도시.’

우리는 너무 바쁘게만 살아온 게 아닐까. 정신없이 바쁘게 바쁘게 달려오다 보니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온 게 아닐까. 노천카페에 앉아 그게 뭔지 생각해 보고 싶은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런 카페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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