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우리는,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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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말들, ‘도와주세요’ 또는 ‘살려 주세요’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구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사람이 있다면, 그 인생은 대체 어떤 삶이었을까? 구해 달라는 말보다 구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 훨씬 비극적이고 더 절박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연경 감독의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영화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죄책감이 몰려온다.

이 영화는 빚만 남긴 채 아빠가 죽고, 도망치듯 엄마와 함께 연고지도 없는 곳으로 이사 온 열두 살 소녀 선유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선유는 겉으로 봤을 땐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마도 아빠처럼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하고 겁이 나서 더 어른처럼 구는 아이이다.

실제 국내 사건 모티브로 연출한 작품
대물림 빚에 저당 잡힌 모녀의 삶 그려
차가운 현실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
비참한 주인공 위로하는 데 초점 맞춰



먼저 영화는 크게 두 개 흐름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선유의 아빠가 남긴 빚 때문에 생겨나는 이야기다. 빚을 갚기 위해서 선유의 엄마는 밤낮없이 일을 하지만 빚은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모녀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선유 또한 잊을 만하면 엄마 친구가 집으로 찾아와 빚 독촉을 하거나, 친할머니가 학교로 불쑥 찾아와 죽은 아빠의 보험금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통에 평온한 학교생활을 할 수 없다. 선유에게까지 이어질 빚의 대물림 그리고 이 빚의 굴레로 모녀의 미래마저 저당 잡혀 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선유와 정국의 관계로 진행된다. 영화 오프닝, 선유가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정국과 만나게 된다. 정국은 선유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선유는 자신과 달리 천진난만하고 걱정 근심 하나 없어 보이는 정국이 싫다. 그런데 사실 선유는 정국뿐만 아니라 자신을 동정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싫다. 그런 시선보다 차라리 왕따로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자존심이 강한 아이가 바로 선유다.

정국은 선유의 독선과 적대를 이겨 내고 선유 곁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비 오는 날 제 우산을 빌려주고,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자고 말을 건네는 등 선유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작품은 결국 선유가 정국의 진심을 느끼고 서서히 정국과 친구가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처럼 영화는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안타까운 현실을 담고 있는 한편 소설 ‘소나기’처럼 아이들의 풋풋한 감정을 담아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이때 정국은 어떤 의도나 계산 없이 선유를 염려하고 위로하는 존재다. 그로 인해 학교 선생도 정국의 부모도 갑자기 사라진 모녀의 부재를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때, 정국만이 선유가 남긴 “나를 구하지 마세요”에 담긴 편지의 뜻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거짓말’임을 알아채고 찾아 나선다. 결국 모녀를 찾아낸 정국은 그들이 외롭게 떠나지 않도록 붙잡는다.

이 영화의 촬영은 김형구 감독이 맡았는데, 선유가 처한 차갑고 무거운 현실을 아프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영화가 신파로 흘러가지 않은 데는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비추는 파스텔 톤의 따뜻한 색감과 촬영 덕분임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엔딩에서 엄마와 딸이 강물에 빠지는 수중씬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이 분명해 보인다.

정연경 감독은 2016년 가을 낙동강 하류에서 엄마와 아이가 시신으로 발견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연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모녀의 비참한 상황보다는 그들을 ‘위로’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춘다. 달리 말해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나를 구하지 마세요’의 이 메시지가 ‘구해 달라’는 절망적인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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