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 들어도 춤” 전설이 된 몸짓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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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최고의 춤꾼’으로 불렀던 문장원 선생의 입춤(왼쪽)과 한량무 모습. (사)문장원기념사업회 제공

“그의 춤은 잔 기교로 장식된 아름답고 곱게 보이려는 그런 춤이 아니었다. 굵은 선과 장중한 멋을 담고 이따금 허공을 내저어 힘이 있게 턱 하고 바닥에 배기는 호기로운 진짜배기 덧배기였다.”

책 <노름마치>를 쓴 진옥섭은 그의 입춤(즉흥춤)을 보고 ‘텅 비운 몸으로 여백과 만나는 한 폭의 세한도’라고 했다. 혹자는 그의 춤 인생을 부산 춤의 역사라 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춤꾼’ ‘마지막 동래 한량’으로 불렀던 동래춤꾼 문장원(1917~2012)에 대한 얘기다.

‘마지막 동래한량’ 문장원 선생
포토 에세이집 ‘빛으로 빛나다’
사진과 글로 생전의 모습 담아
“몸으로 그려 낸 한 폭의 세한도”


(사)문장원기념사업회(이사장 김경호)가 시민들에게 문장원이란 과연 어떤 분인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동래춤꾼, 인간문화재 名舞(명무) 문장원 포토 에세이집-빛으로 빛나다>(엠앤피/128쪽/2만 원)를 최근 펴냈다. 문장원은 ‘동래한량무’ 예능보유자(2005년) ‘동래야류’ 명예보유자(2008년·원양반역)로 지정됐다. 또 부산시 무형문화재 ‘동래 학춤’ ‘동래 지신밟기’ ‘동래 고무’ 등을 발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공로로 옥관 문화훈장(1999년)과 부산시 자랑스런 시민상 대상(2000년), 부산시 문화상(2010년·전통예술 부문) 등을 받기도 했다.

책엔 생전에 춤꾼 문장원이 했던 말들이 소환된다. 그의 말에서 춤에 대한 짙은 애정을 느낀다.

“춤은 자연스러워야 멋이 있어. 팔만 가만히 들고 있어도 그 멋이 뚝뚝 흘러야 그게 진짜배기지. 기교만 너무 많이 부린다고 춤이 아니야.” 문장원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문장원의 제자인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보존회 손심심 회장은 “스승님께서는 춤추는 사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멋이 있고, 한이 있고, 흥이 있어야 ‘얼씨구’하는 추임새가 절로 나온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또 그는 “기본을 중요시하는 선생님은 양팔을 치켜들고 일자 사위만 3시간씩 돌려 친구 중에는 중도 포기를 하고 도망을 가기도 했다. 그래도 난 악착같이 기본을 소화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문장원은 1917년 동래구 안락동에서 태어났다. 동래에서 600여 년을 대대로 살아온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증조부 때부터 포목 도매사업을 하던 부상이었다. 1934년 문장원은 팔선녀를 태우고 말을 잡고 가는 한량역을 맡아 탈을 쓰고 동래야류관 길놀이에 운명과도 같이 처음 참여한다. 그가 18세 때였다. 6·25 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의 국악인들이 문장원과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이는 훗날 문장원이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대한민국 국악계의 원로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책은 이렇게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와 함께한 한 문장원의 삶의 여정이 그의 가족, 제자, 친구들의 사진과 함께 펼쳐진다. 학창 시절 모습부터 일상의 삶, 그리고 명무의 삶까지. 수십장의 흑백과 컬러 사진이 짧은 글과 어우러져 그를 회상한다.

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통민속예술가의 길을 걷는 아들 문용민 씨의 고백도 담았다. 56세가 돼서야 아버지로부터 비로소 춤을 허락받았던 일화 등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걷노라면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은 관객의 허리를 곧추세우고 남은 폐활량을 모아 추임새를 뱉게 하니 보라! 마지막 동래한량이다.’ 그의 춤은 기존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의 몸짓이었다. 대대로 동래에서 살았고, 동래에서 태어나 동래를 남기고, 동래에서 가셨다. 그가 간 지 8년이 훌쩍 지났다. 책과 만남은 오롯이 그를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터이다. 전설이 된 그의 몸짓을 만난다.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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