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99.7% ‘미지의 역사’ 새롭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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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인코그니타 / 강인욱

경주 감포바다의 문무대왕 수중릉. 문무대왕은 자신의 선조를 흉노 김일제라고 비석에 적어 신라 김씨 왕을 흉노의 후예로 자처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경주박물관에 있는 문무대왕 비 조각. 부산일보DB·경주박물관 제공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 고고학자 강인욱(경희대 교수)이 낸 <테라 인코그니타>의 생각이다.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는 ‘미지의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다. 아직 쓰지 않은 미지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떠난 150만 년 전부터 치면 인류 역사에서 기록된 것은 0.3%에 불과하다. 99.7%가 쓰지 않은 역사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는 거다.

인류 역사에서 기록된 것은 0.3% 불과
문무왕 비석에 ‘신라는 흉노 후예’ 증거
흉노, 오랑캐로 불린 것은 ‘중국의 시각’
세계 4대 문명론, 식민 지배 정당화 논리

문무왕 비석 얘기는 놀랍다. 저자는 신라가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고 본다. 신라에서 김 씨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북방계 유물과 무덤(적석목곽분)을 만들었다는 고고학적 사실은 분명하다. 여러 증거들이 많은데 가장 강력한 증거가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 비석이다. 문무왕은 바다의 대왕암에 묻히는 대신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그 비석은 사라졌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인 1796년 발견돼 탁본까지 떠서 청나라에 소개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사라졌다가 1961년과 2009년 경주 민가에서 일부들이 수습됐다. 2009년 발견 때 비석은 가정집의 빨래판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 비석에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를 흉노 김일제라고 썼다. 문무왕은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신라는, 부여씨 계통이었던 부여-고구려-백제에 맞서 독자적인 선민의식이 필요했다는 거다. 즉, 신라는 ‘북방적 선민의식’을 전면에 내세워 부여씨 계통에 맞섰다는 말이다. 당시 흉노는 유라시아 전역을 휩쓸던 롤모델 같은 강국이었다는 것이다. 흉노를 오랑캐로 본 것은 중국의 시각에 불과했다.

나아가 세계 4대 문명론도 어설픈 얘기라고 한다. 그것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활보할 때 만들어진 거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였다. 인류는 이미 후기구석기시대인 2만~1만5000년 전에 4대 문명 발상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문명을 만들었다. 터기 남부 후기구석기 신전(괴베클리 테페유적), 극동의 후기구석기 토기가 강력한 예다.

또 지금은 남부 시베리아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1만 5000년 전 베링해를 건너 미 대륙에 퍼졌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아메리카 백인들은 이 상식을 거부하며 온갖 설을 만들었다. 무자비하게 짓밟은 원주민의 역사를 숨기고 싶어 이리저리 외면해왔던 거다.

이 책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0.3% 기록된 역사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0.3% 범위 안에서도 강요된 일방적 역사를 걸러내고 새롭게 봐야 하고,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외면해온 99.7% ‘미지의 역사’도 새롭게 봐야 한다는 거다.

일본인들의 역사의식도 따져볼 수 있다. 저들은 일왕 만세일계를 외치며 순혈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한다. 2001년 아키히토 일왕은 조상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며 자신의 뿌리가 백제계임을 공식화했다. 과연 백제계 도래인은 일본 ‘고훈시대’(3세기 중반~7세기 말) 역사를 주도한 중추였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백제계에 앞서 이미 2700년 전에 남한(경상도 진주 지역)에서 쌀농사를 짓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전역은 한반도발(發) 쌀농사 문화로 뒤덮였다. 요컨대 일본은 백제계 도래인 단일민족이 아닌 것이다.

일본은 자기들의 기원을 이리저리 바꿔왔다. 처음에는 한국과 중국을 기원으로 보다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자 임나일본부설과 기마민족설을 써 먹으면서 더 먼 북방을 기원으로 바꿨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에 성공하고 ‘탈아입구’를 내세울 때는 아예 ‘일본인 조상은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유럽인’이라는 주장까지 냈다. 이런 아전인수 격의 역사 해석을 지금 중국이 무리수를 두면서 진행 중이다.

코로나19는 우리 세계관에 근본적인 충격을 던지고 있다. 미국의 세계사적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보여줬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들이 급부상하는 문명사적 전환의 시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국의 부상이다. 요컨대 우리가 새로운 역사의 눈을 떠야 한다는 거다. 전제는 분명하다. 아전인수 격이 돼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균형 잡힌 눈으로 세계사를 투시하면서, 그리고 지역사까지 새롭게 쓰면서 우리 안에서도 중앙과 지역의 차별·차등을 없애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거다. 강인욱 지음/창비/380쪽/1만 8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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