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세상이 나를 해고해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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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했다. 7년 동안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했는데 회사는 도리어 권고사직을 통보한다. 쉽게 짐을 쌀 수 없다. 벽을 바라보는 책상 앞에서 하루를 견디고, 어느 날은 동기들의 모욕을 참아내며 악착같이 버텼더니, 상사는 하청업체에서 1년을 지내면 본청으로 복귀시켜주겠다고 한다. 다른 방법이 없는 ‘정은’은 하청업체로 파견을 나간다. 물론 파견업무가 쫓아낼 명분을 찾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다. 정은은 갈 곳이 없다.

정은이 하청업체에서 해야 하는 일은 송전탑 수리보수 업무지만, 사무실에서 서류만 검토했던 그녀에게 현장일은 무리다. 게다가 본청에서는 파견직원 임금까지 하청업체에서 책임지라고 한다. 직원들이 정은을 좋아할 리 없다. 일은 한정적이고 임금도 정해져 있으니 정은은 경쟁자일 뿐이다. 파견직을 그만둘 수 없는 정은은 그날부터 홀로 송전탑 공부를 시작한다.

노동자 다뤄 온 이태겸 감독 신작

권고사직 피해 하청 파견 간 ‘정은’
사무직서 송전탑 수리 현장일 맡아

어두운 이미지보다 뭉클한 감동 커
노동의 의미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정은이 권고사직을 받은 이유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우수사원이었다는 친구의 말과 “일을 잘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라”는 인사팀 직원의 말을 통해 정은의 개인적인 문제로 해고 1순위가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친구의 말처럼 여자라서, 지방대 출신이라서 권고사직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도 ‘부당’한 이유라서 정은은 억울하고 분하다.

아직 현장 일을 숙지하지 못한 채 송전탑 수리 현장에 나간 정은은 거대한 송전탑의 규모에 압도당한 채 공포와 불안감, 두려움을 느끼며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다. 송전탑 수리공, 편의점 아르바이트, 대리기사까지 일을 몇 개를 하는지도 모르는 나이 많은 막내 ‘충식’은 애를 쓰는 정은에게 동료를 믿으라는 조언을 건넨다. 하지만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 해고를 당하는 일이며, 해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료의 죽음에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에서 우정과 연대를 바라는 건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영화는 스위치만 누르면 전기가 들어오는 편한 일상 뒤에 특수노동자들의 목숨(죽음)을 건 일과가 있음을 자연스레 연결시킨다. 누군가의 고통으로 우리의 삶이 이토록 편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 같이 송전탑을 오르는 노동자들을 통해 그리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일상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라고 어두운 이미지를 예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송전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해안가 마을의 풍경, 그리고 정은이 자신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동료인 충식을 위해서 로프 몇 개에 의지해 송전탑을 올라가는 장면은 아름다우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이태겸 감독은 ‘1984: 우리는 합창한다’로 울산 조선소 노동자들의 현실을, ‘복수의 길’에선 사장에게 돈을 받지 못한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벽화를 간직하기 위해 필름을 구하러 가는 소년의 여정을 다룬 ‘소년 감독’까지 불편하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묵묵히 전해왔다. 13년 만에 내놓은 이번 신작 또한 노동자들의 고용불안, 사무직 노동자와 현장직 노동자의 차이, 하청업체에 대한 본청의 갑질을 통해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한가를 구조적으로 살피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의 편에 서서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들의 일이 곧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날 느닷없이 해고당할 수 있는 노동자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 그로 인해 “세상이 등을 돌려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정은의 대사가 마치 ‘자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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