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오갈 데 없다고 받아줬더니 쓰레기만 놓고 가려는 다국적 기업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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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울산 염포부두 정박 중 발생한 폭발 사고 이후 꼬박 1년 만인 지난해 9월 스톨트 그로인란드호가 통영 안정산단 내 HSG성동조선에 입항해 폐기물 처리 작업을 하고 있다. 김민진 기자 2019년 9월 울산 염포부두 정박 중 발생한 폭발 사고 이후 꼬박 1년 만인 지난해 9월 스톨트 그로인란드호가 통영 안정산단 내 HSG성동조선에 입항해 폐기물 처리 작업을 하고 있다. 김민진 기자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더니 지금이 딱 그 꼴입니다. ‘시맨십(seamanship·바람직한 선원정신)’ 운운하며 하소연해 위험을 무릅쓰고 받아줬더니, 급한 불 껐으니 쓰레기만 버리고 간다네요. 기가 찰 노릇입니다.”

울산항 정박 중 발생한 폭발 사고로 1년 넘게 방치되다 잔존 폐기물 처리와 선체 수리를 위해 지난해 9월 경남 통영에 입항한 대형 석유제품운반선 ‘스톨트 그로인란드(Stolt Groenland, 2만 5881t)호’(부산일보 2020년 8월 24일 자 11면 보도 등). 당시 선내에 남은 상당량의 유해 화학물질 탓에 입항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대규모 수리 공사에 따른 경기 부양을 명분을 내세웠던 선사 측이 돌연 말을 바꿨다. 통영에선 폐기물만 처리하고 정작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될 선체 수리는 중국 조선소에 맡기려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측이 제시한 수리 비용이 저렴하다는 이유인데, 고위험 폐기물 처리 부담에도 고용‧낙수 효과를 기대하며 입항을 받아들였던 지역사회는 쓰레기만 두고 떠나려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폭발 사고 석유운반선 스톨트호

고위험 폐기물 처리·수리 명분

반대 무릅쓰고 지난해 통영 입항

급한 불 끄자 수리는 중국서 추진


이 배는 2019년 9월 울산 염포부두에서 하역 작업 중 폭발사고를 겪었다. 당시 선내에는 스티렌모노머(SM) 5245t, 메틸 메타 크릴레이트(MMA) 889t 등 화학물질 수십 종 2만 3000t이 실려 있었다. 이중 SM은 소량만 유출돼도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위험물로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

이를 안전하게 처리하면서 재운항을 위한 선체 수리를 병행할 조선소를 찾던 선사는 중견 업체인 (주)여수해양을 낙점했다. 여수해양은 통영 안정산단 내 HSG성동조선해양에서 작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환경부·관세청 허가를 거쳐 해양수산부에 기항 허가를 신청했다. 안정산단은 국가 간 무역이 이뤄지지 않는 불개항장이라 외국적 선박인 스톨트호가 입항하려면 기항 허가가 필요하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지역 환경단체와 어민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이들은 “유해물질 덩어리가 청정 진해만을 통과해 통영으로 오는 과정부터 심각한 해양오염을 일으킬 것이 뻔하다. 이미지 훼손은 물론, 지역 수산물 가치도 급락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통영시와 통영시의회도 이들과 뜻을 같이하며 해수부를 압박했다.

반면 선사 측은 여수해양을 통해 성동조선이 작업에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보유한 유일한 곳이라며 불가피성을 호소하고 우려하는 추가 오염 사태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특히 중소 조선의 몰락과 관광산업의 위기, 그리고 코로나19 장기화로 침체한 지역 경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득했다.

실제로 이 선박 수리범위는 화물창과 선실구역, 배관, 철의장, 전장 등 사실상 선체 모두로 선박 신조에 맞먹는 대형공사다. 총공사비는 폐기물 처리비 50억 원을 포함해 400억 원 상당, 예상 작업 기간 1년으로 하루 최소 100명, 년 3만 5000명의 노동자가 투입된다. 이를 통해 일자리 창출과 경기 부양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무조건적인 반대보다 합리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지난해 9월, 통영 HSG성동조선에 입항한 스톨트 그로인란드호 선체 내부에서 폐기물 제거 작업이 한창이다. 김민진 기자 지난해 9월, 통영 HSG성동조선에 입항한 스톨트 그로인란드호 선체 내부에서 폐기물 제거 작업이 한창이다. 김민진 기자

찬반이 분분한 가운데 기항 허가를 놓고 고민하던 해수부는 철저한 안전대책 시행을 포함한 11가지 조건을 전제로 허가서를 발급했다. 이후 별다른 충돌이나, 사고 없이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늦어도 오는 6월이면 폐기물 처리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선사 측이 정작 중요한 수리 계약을 미루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에 가면 보다 저렴한 비용에 수리를 마칠 수 있다는 이유다. 이미 중국으로 예인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케이맨제도 선적인 스톨트호의 선주는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STOLT TANKER’사로 특수선 150여 척을 보유한 다국적기업이다.

여수해양 측은 “선주가 수리계약서 작성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지금쯤 (계약이)마무리돼야 하는데 우리도 갑갑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기항 허가 조건 위반이라는 지적이다. 해수부는 기항 허가 조건 중 하나로 ‘출항 전 선박의 안전 및 해양환경 보호를 위해 항해 장비, 선박 엔진, 해양오염 설비 등을 완벽하게 갖춰야 한다’고 명시했다. 게다가 현행 해사안전법은 외국 선박이라도 해양환경 보전에 장해를 미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항행 정지를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조건을 충족하지 않은 상태로 중국으로 예인할 경우, 기항 허가를 취소하고 입출항 통제 등 법적 조처를 할 수 있다는 게 해수부의 입장이다.

실제로 2013년 화재 사고를 당해 울산항에서 화물만 처리하고 수리를 위해 중국으로 가려던 화학제품운반선 마리타임메이지호에 대해 해수부가 입항 허가 조건에 반한다는 이유로 저지, 부산에서 수리를 끝낸 뒤 출항했었다.

폐기물만 떠안게 된 지역사회는 분통을 터트린다. 이대로는 고용과 소비를 통한 경기 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는 “지역을 호구 취급하는 처사다. 이럴 거면 애초에 중국을 갔어야 한다”면서 “이참에 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 정부도 엉뚱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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