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독립유공 서훈 위해 11년째 고투 3·1절에 다시 부르는 회한의 사부곡…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우리 대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이 안 되면 영원히 잊히는 거겠죠.”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조수부(78) 씨는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던 재심의 신청서를 들춰보며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조 씨는 11년째 보훈처와 고군분투 중이다.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해서다. 조 씨의 아버지인 고 조점록(1902~1955) 씨는 1919년 3·1운동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고문을 당했다.

보훈처 “행적 불분명” 인정 안 해
팔순 앞둔 조수부 씨 착잡한 심경
“보훈처 ‘독립사’에 이름 있는데…”

조 씨와 조 씨의 형은 2010년부터 아버지의 서훈 신청을 위해 보훈처만 6차례 찾아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매번 같았다. 만세운동을 한 것은 어느 정도 확인이 되지만, 이후 행적이 불분명해 서훈은 어렵다는 것. 아버지가 만세운동 이후 진주의 한 일제 식품회사에서 3개월 일했다는 기록이 결정적이었다. 조 씨는 근무 기록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마산에 살며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했던 아버지가 진주까지 출퇴근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보훈처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나라에서 인정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가 1919년 마산에서 3·1 만세운동을 이끈 청년이었고, 1920년 3·1운동을 재현하려 전단을 돌리다 일본군에 끌려갔다고 설명했다. 당시 동아일보와 후대에 보훈처에서 발간한 ‘독립운동사’에도 아버지 이름이 남아 있다.

조 씨는 “아버지는 만세운동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를 못 쓰셨다. 가세는 기울어 어머니가 혼자 고생하시고 형제는 뿔뿔이 흩어졌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 조 씨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앓다 53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 씨의 형은 2010년 처음으로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줄 것을 보훈처에 신청했다. 자식 세대에서 서훈이 되지 않으면 아버지의 유공이 영원히 잊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 씨와 같이 싸워 주던 형마저 5년 전 세상을 떠나자 조 씨는 아버지의 명예를 찾기 위해 홀로 국가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훈처에서는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보훈처 측은 “일단 독립유공자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면 그에 대한 입증은 정부가 최대한 돕고 있다. 그러나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인 조선총독부 관보에 일제 식품회사에 근무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판단 기준으로 했다”고 답했다.

조 씨는 “보훈처에서도 전문가가 나서서 아버지의 지난 행적을 확인하려다 포기했다. 그런데 이미 10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그 시절 행적을 어떻게 일개 개인이 입증할 수 있겠느냐”고 가슴을 쳤다.

이 같은 안타까운 상황은 광복회에서도 깊이 공감하고 있다. 광복회가 독립유공자의 공과를 구분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병유 광복회 동부연합 지회장은 “독립운동 행적 자체가 명확하다면 그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독립운동에 기여해 공훈을 인정받아야 할 사람이 소외된 경우가 아직도 너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글·사진=곽진석·변은샘 기자 iamsa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