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영화 '미나리'로 감염병에 맞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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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지난 주말 오랜만에 극장에 나가 영화 ‘미나리’를 보고 왔다. 아직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극장 나들이가 신경 쓰였지만,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갔다. 지난해 제36회 미국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받은 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선정되었을 때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다. 하지만 BIFF 예매에 실패하는 바람에 5개월여를 더 기다려야 했다.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간 한인 가족의 정착기를 그린 ‘미나리’란 영화는 꽤 매력적이다. 대단한 사건 전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소소한 일상 에피소드가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선으로 잘 표현된다. 담담한 결론도 그렇거니와 짜임새 있는 연출과 아름다운 영상은 영화적 완성도를 높인다. 상영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엔딩곡으로 삽입된 ‘레인 송(rain song)’을 타고 전해지는 주연배우 한예리(모니카)의 몽환적이면서도 따뜻한 음성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한인 가족 미 정착기 다룬 ‘미나리’
보편 정서 아름답게 녹여내 뭉클
코로나 위기 속 더 큰 위로와 공감

전염은 곧 우리 연결 관계의 감염
공동체 연대 없이는 극복 어려워
팬데믹 후 변화 우리 자세에 달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셨던 우리 부모님 세대가 생각났다. 어디에나 뿌리내리고 억세게 살아남는 미나리의 운명은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흩어진 사람들)’ 역사를 써 온 재외 한국인 모습과 빼닮았다. 낯선 미국에서 외롭게 지낼 딸을 위해 엄마가 한국에서부터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짐보따리에서 멸치와 고춧가루를 꺼낼 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숲속에서 뱀을 만나 움찔하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게 더 위험하다!”고 알려준다. 인생의 경험치에서 체득한 삶의 지혜일 거다.

최근 ‘골든글로브’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면서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은 “‘미나리’는 그들만의 언어로 얘기하려고 애쓰는 가족의 이야기”라면서 “이는 미국 언어나 그 어떤 외국어보다 깊은 진심의 언어(Language of Heart)”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사랑의 언어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법을 배우길 바란다”고 말했다. 가족의 사랑을 전하는 ‘미나리’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 보편적 공감대를 얻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만, 뜻밖에도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도 특별한 위로와 공감으로 다가왔다.

사실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급속하게 무너진 게 우리의 일상이다. 백신 접종은 시작됐지만, 1년 넘게 지속하면서 알게 모르게 지쳐 가는 중이다. 자유롭지만 동시에 고립된 존재로서 늘 감염을 걱정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경제냐 방역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지만, 당장 생계를 걱정하는 자영업자는 영업 제한 시간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둔다. 오늘도 부산시청 앞에서 “우리 좀 살려 달라”는 절규의 시위가 벌어진다.

이탈리아의 지성 파올로 조르다노가 일찌감치 설파했듯, 전염은 우리 연결 관계의 감염이다. 그의 말처럼 지금 이 시대는 ‘전염의 시대’라 할 만하다. 다만, 우리가 왜 오늘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이면은 꼼꼼하게 읽어 낼 필요가 있겠다. 조르다노가 지적한 것처럼,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만은 아니고, 현재 벌어지는 일이 우연한 사고도, 천재지변도, 새로운 것도 전혀 아니며, 과거에 이미 발생했고 앞으로 또다시 벌어질 수 있어서다.

코로나19 위기 역시 가장 느슨해진 연대의 고리를 파고들어 가장 취약한 사람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현재로선 코로나19 충격이 본질적으로 ‘검은 백조(black swan·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실제로 나타나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것)’가 될지 ‘회색 코뿔소(gray rhino·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경고음을 내면서 빠르게 다가오는 위험)’가 될지 섣불리 판단하지 못한다. 분명한 건 나이, 성별, 지역, 국적, 인종을 떠나 모두가 연대하지 않으면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존 던(John Donne)의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한 대목처럼, “세상 누구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는 것을 우리는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염의 시기가 폭로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에 대해 절대 귀를 막아선 안 된다. 유례없는 팬데믹이 지나고 난 뒤 어떤 변화를 맞을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한예리 배우의 “잠시라도 위로를 주고 보듬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는 말을 곱씹는다. 이왕이면 오는 15일 후보 발표에 이어 내달 25일 아카데미 시상식 때 ‘미나리’가 지난해 ‘기생충’의 영예를 이어 가면 좋겠다. 지친 우리 국민들에게 위로와 환호의 시간이 되기에 충분할 듯싶어서다. 그나저나 지금은 봄 미나리 철이라는데, 제법 물이 올랐으려나 궁금하다. 마른 가지에 봄물 오르듯 사랑과 연대의 봄소식도 기대해 본다.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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