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기억하는 공간, 도시재생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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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삼광빌라를 떠나지 않아도 된다니 정말 잘 됐다.”

지난 주말 종영한 KBS 드라마 ‘오! 삼광빌라!’의 주인공 순정이 한 말이다. 핏줄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그게 가족이라는 내용을 담은 이 드라마의 종반에는 ‘삼광빌라 구하기’가 나온다.

건축은 공간에 기억을 채워 넣는 것
불행했던 과거도 외면하지 말아야
도시재생 위한 적극적인 공약 기대

건물 주인이 재계약을 해 주지 않아 삼광빌라를 모두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한때 기억을 잃어 제임스 씨로 살았던 우정후가 삼광빌라를 매입해 순정에게 공동 운영을 제안한다. 매입 금액은 삼광빌라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태는 걸로 하고 말이다. 고마워하는 순정에게 우정후는 “삼광빌라에 있었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었다”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늘 공간이 함께한다. 함께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빠질 수 없다. 눈부신 햇살, 살랑거리는 바람…. 물론 비 오는 날이어도 상관없다. 그날의 공기마저 담은 기억은 다시 예전 그 공간과 마주할 때 오롯이 살아난다.

어찌 행복한 순간만 있겠나. 아팠던 순간, 떠올리기 싫은 순간의 기억은 공간마저도 애써 외면하게 만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같은 공간이라도 사람마다 추억하는 방식은 다르다. 공간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기억을 채워 넣는 것, 그게 바로 건축이다.

독일의 주택 앞 점토 블록 사이에는 사람 이름이 새겨진 돌이 박혀 있는 경우가 있다. 이름뿐 아니라 태어난 해, 그리고 사망한 해 또는 추방당한 해도 새겨져 있다. ‘걸림돌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이것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이 추방당하거나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에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한 작업이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이 돌멩이에 걸려 다시는 아픈 역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반성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공간은 이렇게 거주자들이 떠난 후에도 새로운 사람과 함께 삶을 이어가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의 공간을 지우기에 급급했다. 거기에 개발을 얹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한두 곳이 아니다. 최근에서야 스토리텔링과 함께 지역의 정체성, 혹은 역사 보존의 의미를 담고자 하지만 개발과 재생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 지역은 슬럼화 현상을 맞이한다.

대표적인 곳이 완월동이다. 완월동은 행정지명이 아니다. 부산 충무동과 초장동에 걸쳐 있는 이곳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공창’이자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성매매 집결지였다.

몇 번의 완월동 폐쇄 계획이 무산된 상황에서 국토부 공모를 통한 정비가 마지막이라는 주민의 입장과 재개발만이 동네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집결지 관계자들의 주장이 대립하기도 했지만, 지난해 부산시는 완월동 일대를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으로 지정했다. 여성 자활시설, 주민 편의시설 등을 지어 도시를 재생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서구청은 국·시비를 포함 총 320억 원을 들여 재생사업을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국토부 공모에서 탈락했다. 중심시가지형 공모사업에 12곳이 참여해 9곳이 선정됐는데, 떨어진 3곳 중 하나가 완월동이다. 선정된 지자체 사업들이 재수, 삼수 끝에 선정되었다며 서구청은 올해 재도전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하나 무엇보다 부산시 의지가 관건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행복했던 순간만 기억에 담아 둬야 하는 건 아니다. 불행했던 과거를 외면하지 않아야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완월동은 일제강점기 역사와 여성의 몸을 착취 대상으로 삼는 성매매라는 아픈 기억이 상존하는 곳이다.

윤락가라는 의미보다 근대사에 초점을 맞추면, 골목은 일제강점기 구획대로 남아 있고 최초 유곽 장소는 공터로 남아 있다. 적산가옥을 비롯해 근대사를 볼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하다. 완월동에서 조금 올라가면 아미동 비석마을이, 더 올라가면 감천 문화마을까지 연결된다.

부산시는 완월동 성매매 업소의 범죄 수익을 추적해 4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몰수했다. 완월동 도시재생 사업비 320억 원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초기 자본으로는 손색없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가 확정됐다. 당선된 여야 두 후보 모두 당내 경쟁자들을 큰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 다음 달 7일, 누가 당선되든 가덕신공항에 전력투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은 어떤 공약도 가덕신공항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한다. 본격적으로 선거 유세가 시작되고 공약이 난무할 때 큰 그림 안에 갇혀 보이지 않는 도시재생에 대한 적극적인 공약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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