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파도가 다듬은 바위의 사연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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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바다 여행

경북 경주의 바다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다. 경주는 부산의 1.7배 정도로 넓고, 바다 말고도 도심과 산에 유적지들이 빼곡하고, 요즘 가장 붐비는 ‘황리단길’도 시내에 있다. 그래도 왜 굳이 경주 바다를 보러 가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시간과 파도를 따라 가는 경주 바다 여행.


문무왕 유언 좇아 만든 문무대왕릉
영험함 끌린 듯 갈매기·무속인 몰려

읍천~하서항 1.7km 파도소리길
온갖 기둥 모양 주상절리 박물관


■1300년 전 왕과 절과 피리

부산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남짓이면 경주문무대왕릉 주차장에 도착한다. 해변으로 내려서면 생각보다 가까이 작은 바위섬이 보이고, 대왕암이라고도 부르는 이 경주문무대왕릉을 호위하듯 해변을 까맣게 채운 갈매기들이 시야를 압도한다. 시선을 돌리면 깃발 따위를 챙기는 무속인 무리도 보인다. 여기에 비가 채 물러가지 않은 흐린 하늘까지 더하면 무속인을 불러모은다는 이 곳의 영험한 분위기가 대번에 납득된다.

경주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은 신라 제30대 왕 문무왕의 수중릉이라고 안내문에는 적혀있다. 유골을 매장했다는 말도 있고, 화장한 뒤 대왕암 주변에 유골을 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변에서는 대왕암의 정면밖에 볼 수 없지만, 상공에서 보면 자연 바위 안에 바닷물이 드나들게 만든 인공수로가 있고, 중앙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거북모양 돌이 남북으로 놓여있다고 한다. 대왕암은 약 5000만 년 전 신생대에 형성된 화강암으로 경주 동해안 지질 명소의 하나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정복하고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 676년 삼국통일을 이룬 왕이다. 5년 뒤 세상을 떠나면서 호국의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 “내가 이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 되었다. 조금이라도 나라에 보탬이 된다면 짐승이 되어도 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왜 짐승이 되려 하냐는 질문에 문무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호국의 기상보다도 삼국통일을 이뤘으나 세상의 영화가 싫어 차가운 바다에 묻힌 왕의 속내가 더 와닿는다.

대왕암이 있는 해변은 봉길대왕암해변이라고 부른다. 백사장 위로는 간이텐트 굿당이 늘어서있고, 횟집촌 곳곳에 보이는 ‘방생 고기 팝니다’ 같은 문구도 낯설다. 이곳에서 1.6km 떨어진 이견대(사적 제159호)에 오르면 경주문무대왕릉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화재청이 대왕암을 문무왕의 장례지로 확인한 게 1967년이고, 신라시대 건물터를 토대로 이견대를 복원한 것이 1979년이다.

이견대도 인근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함께 문무왕의 이야기가 깃든 곳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문왕은 즉위 2년인 682년 선왕 문무왕의 뒤를 이어 감은사를 완공하고, 그해 이견대에 올라 동해에서 감은사를 향해 떠오는 작은 산을 바라본다. 신문왕은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려 한다는 점괘에 따라 이 산에 들어가서 용에게 대나무를 받는데, 이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다.

적이 물러가고 병을 낫게 한다는 만파식적은 전설 속에만 있고, 감은사도 터만 남았지만, 거대한 삼층석탑 두 기는 1300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금도 굳건하다. 2단 기단 위에 올린 3층 탑신과 지금은 사라진 상륜부를 꿰고 있던 쇠기둥(찰주)까지 더하면 높이는 13.4m. 신라시대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3층 석탑이다.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들었다는 금당 터 아래 인공 연못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2000만 년의 시간과 파도

파도소리길의 시작점인 읍천항은 감은사지삼층석탑에서 차로 10분 남짓 거리다. 파도소리길은 읍천항에서 하서항까지 1.7km를 바다와 주상절리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2011년 일반인에게 공개됐고, 이듬해 트레킹 길이 조성됐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이 천연기념물(제536호)로 지정된 것도 같은 해다. 해파랑길과 2017년 전국에서 9번째로 인증된 경북 동해안 국가지질공원에 속한 곳이기도 하다.

읍천항은 산뜻하고 따뜻한 느낌의 작은 어촌마을이다. 파도소리길 입구의 하얀 등대와 항구 이름 자음을 딴 ‘ㅇㅂㅊ’ 모양 조형물 지점에서부터 카메라가 바쁠 것이다. 여기에서 출발해 산책로로 들어서자마자 이 길의 이름이 왜 파도소리길인지 금세 알게 된다. 왼편으로 펼쳐진 드넓은 바다의 풍경과 동시에 파도소리가 와르르 쏟아진다. ‘철썩철썩’도 아니고 폭포소리나 빗소리처럼 ‘솨솨솨’하는 파도소리는 전 구간 내내 끊기지 않고 함께한다.

파도는 주상절리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시각적 경험과 경쾌하고 시원한 청각적 경험으로 동시에 덮쳐온다. 파도 곁이 아니라 파도 위를 걷는 느낌이다. 이곳의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기 중에서도 5800만 년 전에서 2000만 년 전 사이에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바다와 차가운 공기를 만나 수축하면서 사각, 오각, 육각 기둥 모양으로 굳은 암석이다. 인류의 조상인 유인원이 출현하기도 전의 시간이 지금 여기 바람과 만나는 풍경인 것이다.

산책로는 나무데크길과 포장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평탄한 해안길이다. 짧지만 아찔한 출렁다리를 지나면 곧 경주 양남 주상절리 전망대다. 전망대는 이곳 주상절리 중에서도 주연 격인 부채꼴 주상절리를 굽어보는 곳에 2017년 개관했다. 보통 커다란 기둥 모양인 주상절리와 달리 꽃송이처럼 활짝 펼쳐진 부채꼴 주상절리는 세계적으로 희귀하다고 한다. 전망대 4층에 올라가면 주상절리가 이어진 바다 전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이어지는 길에서는 몽돌길과 위로 솟은 주상절리, 누워 있는 주상절리, 기울어진 주상절리를 번갈아 만날 수 있다. 주름치마 같기도 하고, 가래떡을 쌓아서 절반으로 잘라놓은 것 같기도 하고, 기암괴석 절벽의 미니어처 같기도 한 갖가지 주상절리들이 푸른 바다 곳곳에서 파도를 맞으며 선 모양을 보면 주상절리 박물관이라고 불린다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운 소나무들도 이 절경의 퍼즐 조각을 담당한다.

종점인 하서항에는 긴 방파제 끝에 사랑의 자물쇠 모양 조형물이 있다. 연인들의 카메라가 특히 바쁜 곳이다. 길지 않은 길이지만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벤치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려면 편도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로 넉넉히 시간을 잡아야 한다. 주의할 점이 있다. 지난해 태풍으로 산책로 일부가 유실돼 전 구간을 안전하게 걸으려면 경주시청에 전화해서 복구 현황을 먼저 확인하는 편이 좋겠다. 글·사진=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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