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소낙눈 / 유병근(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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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은 낯익은 길을 까먹고 어제 그 골목을 지웠다 낯익은 길은 낯선 길을 까먹고 오늘 그 골목을 지웠다 낯선 바람과 낯익은 바람 변두리에서 탈을 쓰고 웅성거리는 마을이 띄엄띄엄 지나갔다 강변마을에서 강변마을로 주저앉는 날이 있다 낯선 개산초나무와 낯익은 개산초나무를 돌아보는 눈에 나무의 결이 자꾸 흐리다 흑백필름이 헛돌고 있다 날이 저물고 낯선 얼굴과 낯익은 얼굴은 어깨 찌그러진 실루엣 틈새로 기울고 있다

-시집 중에서-

낯익은 소낙비는 그냥 지나치지만 낯선 소낙눈은 오래 가슴에 남아있다. 내리는 눈으로 길은 지워지고 세상은 흑백필름이 되어 헛돌고 있지만, 낯익음과 낯섦의 틈새 사이로 삶은 또 기우뚱 지나간다. 낯익은 일상은 삶의 진부함을 반복해 보여주지만, 낯선 일상은 삶의 여백을 슬며시 안겨준다. 낯익은 삶의 고단함과 낯선 삶의 경이로움이 겹쳐 지나가는 순간, 삶은 또 흐리게 흐리게 저물어갈 것이다.

등단 이후 50년간 부산 시단을 지키며 시적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끊임없는 작품 활동으로 후배들에게 시의 위의를 가르치며 살아온 유병근 시인은 시, 동시, 수필을 넘나들며 일상 속에 숨어있는 사물과 자연을 찾아서 언어의 숨결을 불어넣어 왔다. 이러한 시인의 ‘그림자 놀이’(시인의 표현)가 주는 낯섦이 모두에게 낯익음으로 다가올 때 우리 삶도 조금씩 여물어질 것이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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