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마른 꽃/안효희(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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빳빳하게 선 채 말라서 죽을 뿐, 꽃병의 꽃들은 함부로 시들지 않는다 식탁 위 간장도 단단하게 굳고, 먹다 남긴 토스트조각 또한 만지자마자 부스러질 뿐, 시드는 것이 아니라 말라가는 것, 말라가며 천천히 부서져가는 것



가습기를 튼다 하얀 수증기 곁에서 커다랗게 입을 벌린다 풀무질로 이불 홑청을 펴듯 꽈리처럼 오그려 붙은 내 몸, 몇 개의 주름이 펴진다 부스러지지 않는 진동기의 떨림, 부스러지지 않는 떨림을 생각한다



모서리마다 각이 진 목관(木棺) 하나 윗집에서 내려온다 관이 흔들릴 때마다 펄럭이는 생전의 붉은 치마, 엷은 바람에너울너울 부스러진다 박제되는 삶, 소리도 없이 혼자 피는 마른 꽃



-시집 (2018) 중에서-
들에 핀 꽃은 시들어 떨어지지만 실내 화병에 꽂힌 꽃은 시드는 것이 아니고 말라간다. 죽음의 다른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환원되지 못하는 죽음의 이유로 시인은 수분을 말하고 있다. 소통되지 않는 삶, 격리된 삶은 자연의 수분을 제공받지 못한다.

스티븐 호킹은 물, 빛, 물질끼리의 당김만 있으면 생명은 어디서나 만들어진다고 했다. 이렇게 생명의 필수 구성원인 수분은 어디서나 제공되어져서 인체의 70% 이상이 수분으로 채워져 있고 여러 형태로 삶의 소통 역할을 하고 있다. 수분이 소실되면 삶의 유연성과 탄력성이 소실되고 시인은 이런 삶을 박제된 삶이라고 표현한다. 수분이 소진된 상태에서도 견딜 수밖에 없는 처연한 생명력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흐르는 물의 풍요로움은 때로 삶의 덧없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물 부족으로 말라가는 꽃 한 송이가 삶의 끈질긴 부박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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