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칼럼] 지역을 보는 지리적 상상력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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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수도권의 코로나 감염 사정이 심상치 않다. 인구밀도가 높고 사람의 접촉이 여타의 지역보다 더 빈번한 탓이다. 서울은 이미 만원이다. 하지만 경기와 인천 나아가서 강원과 충청까지 외연을 넓혀 가면서 서울 집중의 문제를 확대 재생산한다. 일극 중심에 그 주변이 끊임없이 흡수되는 형국인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교통 미디어가 갖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 확대되고 있다. 서울은 그야말로 거대한 블랙홀이 되었고 빈부로 분단되고 공간적으로 분리된 여러 격차를 품은 거대도시로 변하였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소위 수도권에 살고 있지만, 부와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가려는 우리 사회의 열망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출산율 저하로 국가 전체 인구가 줄고 있으나 수도권의 인구는 늘어만 간다. 기이한 현상이다.

수도권 코로나 감염 확산 속
‘원정 유흥’은 비난받아 마땅

가덕신공항·이건희 미술관 요구
지역 떼쓰기로 오해 안타까워

일극 중심 탈피할 상상력 절실
부산이 한국 대전환 앞장서야


최근 ‘원정 유흥’이라는 말이 생겼다. 변이 바이러스 등의 여파로 확진자가 크게 늘고 감염이 확산되고 있는 수도권의 방역 규제를 벗어나 부산 등지로 유흥을 위하여 이동한다는 이야기이다. 피서나 휴양과 다른 형태의 욕망 충족의 양상인데 지역 도시의 입장에서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저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관광객을 수용하듯이 원정 유흥에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칫 방역에 구멍이라도 나면 그나마 완화된 지역 현실이 급속하게 얼어붙을 공산이 크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욕구 분출을 위하여 규제가 풀린 지역으로 이동하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원정 유흥을 시도하는 일부 몰지각만 문제가 아니다.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인지 한계는 이미 ‘지역 인지 감수성’ 부족이라는 말로 비판받아 왔다. 지역을 알지 못하거나 바라보는 시각이 일방적이라는 뜻이다. 가령 가덕신공항 건설이나 이건희 미술관과 같이 기념할 만한 문화시설을 유치하는 일 등의 현안을 두고서 수도가 아닌 곳에 그런 게 필요하냐는 비아냥을 쉽게 듣곤 한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서 너희들이 감수성이 부족하구나, 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거꾸로 제발 우리를 잘 이해해 달라는 떼쓰기처럼 비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지역 인지 감수성을 높여야 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고민할 때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전반적인 지리적 상상력의 빈곤을 들고자 한다. 먼저 서울과 지방, 수도권과 비수도권이라는 이분법적인 인식 체계가 무엇보다 문제이다. 이러한 이분법에 기대어 중심에 의한 지역의 종속을 말하거나 심지어 지역이 ‘내국 식민지’ 상황이라고 분노하며 비판한다. 종속 이론의 일국적 변용에 가까운데 자칫 현실을 고착된 표상으로 인식할 여지가 없지 않다. 사실 국가 스케일 중심 시각은 다층적인 로컬의 문제를 중앙정치로 회수하는 오류를 만든다. 오늘날 풀뿌리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태도 중앙정치의 과도한 개입에 연유한다. 권역을 다수화하거나 복안(複眼)으로 지역을 이해하는 방법이 더욱 요긴하다.

서울이 머리이고 수도권이 몸통이며 여타 지역이 팔과 다리라는 유기체 비유도 있다. 사회 유기체론을 은유로 바꾼 셈인데 이보다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 기계의 유비(類比)가 더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체라면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조차 함께 살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팔과 다리에 해당하는 지역이 지리멸렬해져 죽거나 소멸할 지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기계가 성능이 좋아지면서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있다는 설명이 이해에 적합하겠다. 인공지능이 기계를 통어하듯이 서울 혹은 수도권이 모든 지역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달리 보면 하나의 나라는 거대한 화원이어야 한다. 이곳, 저곳에 서로 다른 나무와 꽃들이 자라고 피어서 조화를 이루는 정원이면 더욱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나의 유기체도 하나의 기계도 오늘날의 국가를 비유하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

간혹 지도를 거꾸로 들고 부산을 찾아본다. 그럴 때 부산이 한반도의 끝에 있지 않고 아시아 지중해의 한가운데 있음을 발견한다. 서울보다 넓은 면적을 지녔으나 인구는 그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대양으로 열린 항구를 지녔다. 일제 말의 대동아공영권 지도를 보면서 숨 막힌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태평양을 다 차지하겠다는 일본의 야욕이 미국과 충돌하여 패배한 일은 사필귀정이다. 그 안에 우리가 갇혀 있었다는 역사적 기억은 끔찍하다. 하물며 좁은 반도 안에서 서울중심주의 체제 속에 포박된 부산을 생각하는 일은 처참하기만 하다. 일극 중심 체제를 벗어나는 지리적 상상력이 더욱 절실하다. 부산이 바뀌면 한국이 바뀌는 대전환을 궁리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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