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동등성의 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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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원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정치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차이와 갈등을 표출하고 이를 조정해서 최종결정을 수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차이와 갈등을 표출하는 일에는 과도하게 유능하지만, 이를 조정하고 최종결정을 내리는 일에는 무능하기 그지없다. 우리 정치가 이렇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동등하지 못하다는 점에 있다. 시민들 간의 동등성을 확보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필수적인 준칙이자 운영원리다.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먼저, 민주주의의 주요 가치인 평등·자유·인권·정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시민들 간의 동등성이 요구된다. 모든 시민은 동등한 평등과 자유, 인권과 정의를 누려야 한다. 누군가 차별적으로 더 많은 평등과 자유, 인권과 정의를 누린다면 그 공동체는 더 이상 민주 공동체가 아니고 그런 공동체에 자발적인 충성심을 바칠 시민은 없다.

평등·인권 등 민주 공동체 필수조건
존중·배려·대화가 합의 가능케 해
선출직과 시민은 서로 평등한 관계
과도한 불평등·양극화 차등의식 양산
비례대표제로 개정해 사표 없애야
죽기살기식 정치문화는 갈등만 표출



정치가 구성원 간의 차이와 갈등을 조정하고 최종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도 시민들 간의 동등성이 요구된다. 서로를 동등하게 소중히 여기는 시민들만이 빈부격차와 지위고하를 떠나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대화하고 합의하고 절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등적인 시민들 간에는 무시와 단절만 있고 존중과 이해, 배려와 대화, 합의와 절충이 있을 수 없다. 사실 천부인권과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지닌 시민들은 모두 동등하게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등성을 인권과 기본권으로부터 이론적으로 부여받은 것과 그 동등성을 타인으로부터 실제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다른 일이다. 문제는 우리 정치에서 이론적인 동등성과 실제적인 동등성이 모두 부족하거나 부재하다는 점이다. 우리 시민들은 자신이 인권과 기본권에 의해 부여받은 동등한 시민이라는 점을 확고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 정치에서는 지위 고하나 과도한 빈부격차로 인해 자신들이 실제적으로 차등적인 존재라는 점을 직접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에서 이러한 차등성의 정치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첫째, 선출된 정치인과 시민들 간의 차등성이 강하다. 원래 선출된 정치인과 시민들은 차등적인 둘이 아니라 동등한 하나다. 선출된 정치인과 시민 모두가 동등한 주권자이며 인권과 기본권에 의해 동등성을 부여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등한 주권자 간에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민주공화국에서는 선출된 정치인과 시민 모두가 치자이자 피치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 현실은 다르다. 선출된 정치인은 치자로 군림하고 시민들은 피치자로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과도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시민들의 동등성을 훼손하고 있다. 결과적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과도한 권력집중을 차단해야 한다. 경제 권력이 정치 권력마저 행사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또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는 시민들에 대한 사회복지적 지원도 필요하다. 경제적 차등이 정치적 차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의 민주주의는 다수결 민주주의인데, 이는 시민들의 동등성이 아닌 차등성에 기초해 있다. 다수결 민주주의에서는 한 표라도 더 얻은 후보나 과반을 득표한 후보가 선출된다. 그러다 보니 사표가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주권자 시민들이 모두 동등하게 소중하다면 시민 한 명의 표라도 사표가 되면 안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 선거제도를 좋은 비례대표제로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례대표제에서는 정당이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과 그 정당의 의회 의석수가 비례한다. 사표가 없어지고 주권자 시민들의 한 표가 모두 동등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차등성의 정치가 가져온 가장 큰 문제점은 이것이 우리 정치에서 배제와 갈등의 정치, 죽기살기식 정치를 야기해왔다는 점이다. 시민들 간의 동등성이 무너지면서 시민들 간의 존중과 이해, 배려와 대화, 합의와 절충은 더 어려워졌으며, 우리의 정치문화는 무조건 서로를 배제하고 반대하고 투쟁하고 불복하는 방향으로 굳어져 왔다. 차등성의 정치가 굳어지면서 우리 정치는 차이와 갈등을 극렬하게 표출할 뿐 이를 조정하고 최종결정을 내리는 일에 계속 실패해 온 것이다.

차등성의 정치 속에서 우리 정치는 희망을 잃었다. 이제 우리 정치를 동등성의 정치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과 선출된 정치인은 공히 실질적으로 동등한 주권자가 되어야 하고 실제적으로 동등한 치자이자 피치자가 되어야 한다. 또 제대로 된 비례대표제와 실효적인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해서 실질적인 표의 동등성을 확보해야 하고, 동등성의 정치를 도입해서 정치 행위자 간의 존중과 이해, 배려와 대화, 합의와 절충의 정치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정치가 살고 우리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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