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일꾼' 성적표] 1. 조례 90%가 표절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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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의 건수 독주 사하구, 고유조례는 6.8% ‘평균 이하’

그래픽=류지혜 기자 그래픽=류지혜 기자

주민들이 가장 크게 체감하는 삶의 변화는 기초지자체의 ‘조례’를 통해 이뤄진다. 때로는 작은 기초자치단체에서 만들어진 조례가 마을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변화시켰다. 무상급식 조례는 보편 복지에 불을 지폈고,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인권을 재조명했다.

지역 기초의회 의원은 기초자치단체와 관련된 조례를 제정하는 입법 활동과 예산 심의·확정 업무, 자치행정의 집행을 감시 감독하는 업무, 지역주민들을 대표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자치단체와 의견을 조정하는 업무 등을 한다. 그 중에서도 광역의회가 아닌 기초의회의 조례는 시민들이 알기 쉽지 않아 단순히 발의 건수 등으로 의회의 ‘성실함’ 정도를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초의회 입법 활동에 대한 무관심 때문인지, 〈부산일보〉 취재 결과 부산 16개 구·군이 품앗이하듯 베껴 온 조례가 각 구·군 조례의 90%를 차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업무가 새로 생김에 따라 불가피하게 모방해야 하는 조례도 있지만, 타 시·도에서 최초로 발의된 조례를 그대로 가져와 발의하거나 사실상 집행된 적도 없는 조례가 수두룩하다. 게다가 급하게 베끼는 탓에 어설프게 조례를 제정한 뒤 추후 개정된 사례도 적지 않다.

한 지자체 유일 조례 7.1%뿐

‘지역 맞춤형’ 고유조례 빈약

선언적·미집행 복제 조례 많아

‘발의 건수=실적’ 통념 깨야

“단체장-의회 정치적 긴장감 등

의정활동에 실질적 영향 끼쳐”


■조례 10개 중 9개는 타 구·군 베꼈다

올 5월 기준 부산 16개 지자체의 조례는 총 4393개다. 각 조례는 지자체 1곳에만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적게는 2곳, 많게는 16개 구·군 모두 사실상 중복되기도 했다. 문제는 여러 지자체에 쉽게 퍼진 조례일수록 선언에 그치거나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있으나마나 한 조례가 되기 쉽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12개 구·군이 제정한 ‘관광진흥조례’는 “지역 관광 사업을 개발해야 한다’는 막연한 선언이 전부다. 지자체 10곳에 중복되는 ‘인권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는 지역 인권 실태조사 시행이 의무이지만, 3~4곳을 제외한 다수 지자체가 계획 수립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부산일보〉와 부경대 지방분권발전연구소의 조사 결과, 부산 16개 지자체 조례 중 지자체 1곳만 보유한 ‘고유조례’는 310개였다. 비율로 따지면 7.1%다. 이를 반대로 뒤집으면 100개의 조례 중 약 93개는 다른 지자체 조례를 모방한 ‘중복조례’라는 뜻이다.

고유조례를 가장 많이 보유한 지자체인 기장군도 전체 조례 중 고유조례 비율은 18.2%에 그쳤다. 기장군 조례 302개 중 기장군에만 유일하게 제정된 조례는 55개다. 이 비율이 가장 낮은 수영구(3.6%)는 조례 대부분이 다른 기초지자체와 중복됐다.

이런 조례 모방은 특정 지자체가 조례를 최초로 제정하면 다른 구·군에 같은 내용의 조례가 빠르게 복제되는 형태로 반복됐다. 부산 한 지자체 의회사무과 관계자는 “집행부 업무나, 의회 운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공통으로 겹치는 조례가 있긴 하지만, 다른 구·군 조례를 모방하는 건 보편적인 입법 행태”라고 토로했다.

■고유조례는 평균 이하

민선 1기가 시작된 1991년 지난해까지 부산 16개 기초자치의회 중 가장 많은 조례가 발의된 곳은 사하구(2816건)다. 가장 많은 조례를 쏟아냈지만 사하구는 현행 조례 266개 중 다른 구·군의 조례와 겹치지 않는 고유한 조례는 18개(6.8%)에 그쳤다. 이는 부산 전체 고유조례 비율(7.1%)보다 낮은 수치다. 조례를 많이 발의하는 의회가 일을 잘한다는 통념을 뒤집은 것이다. 반면, 강서구의회는 16개 구·군의회 중 발의 건수가 807건으로 가장 적었지만, 고유조례 비율(8.1%)은 평균을 웃돌았다.

지자체 1곳에만 제정돼있는 고유조례는 해당 지역의 특색을 잘 반영한 조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고유조례가 많을수록 지역 맞춤형 입법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의원은 조례 발의 수를 입법 실적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살펴본 결과 발의를 많이 한다고 해서 고유조례 비율이 높은 것이 아니었다.

차재권 지방분권발전연구소장은 “의회가 조례 발의를 자주 한다고 해서 지역 특색이나 주민 수요를 반영한 고유조례를 많이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면서 “오히려 집행부와 의회 간 소속 정당에 따른 정치적 긴장감, 지역 특수성 등 수많은 요인이 얽혀 의정활동 실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헀다.

■조례 모방, 어떻게 이뤄지나?

조례 모방은 상위법이 개정되면 조례를 만들 수 있는 근거가 생기면서 조례 제정 시 다른 지자체 사례를 참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전통시장법 등이 개정되면서 ‘골목형 상점’에 대한 정의와 지원 근거가 마련됐는데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골목형 상점에 대한 지원조례를 쏟아내면서 근거 조항들이 복제되는 방식이다. 이들 조례에서 현실에 맞지 않는 골목형 상점 기준이 제시돼 단 한 곳도 골목형 상점으로 지정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부산에는 부산 3개 지자체 등이 발의했고 나머지 일부 지자체도 제정을 준비 중이다.

또 전국적으로 인기를 끈 선언적 조례를 복제하기도 한다. 지역주민들이 한복을 입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의 ‘한복 입기 활성화 및 지원 조례’가 2009년 4월 전라북도에서 가장 먼저 제정됐다. 이후 타시도에서 모방하면서 부산 동구에 이어 영도구에서도 발의됐다. 12개 부산 지자체가 가지고 있는 ‘관광진흥 조례’와 같이 기존의 업무 내용을 그대로 조례에 명문화하는 방식으로도 모방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산 기초의원은 “현실과 맞지 않는 법이 그대로 복제돼 사실상 실효성이 없거나, 선언적인 의미로만 조례가 존재하면서 실제로 쓰이지 않는 부작용이 빈번히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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