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반성 / 김점미(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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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린다

쓸쓸한 뒷모습에 고정시킨 눈,

그리기에 몰두한 채

너무 많은 선과 면을 그렸다

한발 물러서서

그림을 바라본다

너무 많은 선과 면이 부담스럽다

담담히 돌아서서 하나씩 지운다

흔적만 남았다

흔적만 남은 그림을 벽에 건다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그림을 바라본다

다시 담담히 돌아서서

그림 밖으로 나온다

그림 주변에 선 나도 지운다

흔적 속의 나는

편안하다

-시집 (2013) 중에서-
비가 오는 창밖의 세상이 흐려 보여서 손으로 창을 쓱 닦는다. 닦은 만큼 창밖 세상이 잠시 맑게 보이지만 창에 뚜렷이 남은 내 손자국이 바깥세상을 또 흐리게 만든다. 갠 날 태양 아래 서서 내 뒤에 생기는 그림자가 태양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늘 살아가지만 나의 그림자는 태양 때문이 아니고 나의 존재 때문에 생긴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살아가면서 그려가는 인생의 그림에는 본인의 많은 손자국과 그림자가 들어있다. 존재보다는 소유에 치중하는 삶일수록 손자국과 그림자는 더욱 많아진다. 삶은 진행형이다. 흔적을 만들어 왔던 생을 뒤돌아보고 이제는 자신이 만든 흔적을 지워나가는 시인은 남은 여백만으로도 삶이 아름답다는 걸 깨닫는다. 소유보다는 존재가 빛나는 순간이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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