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아베 올림픽’과 일본의 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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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영광’ 재현 꿈꾸는 강경 우파의 ‘정치 이벤트’

도쿄올림픽 선수촌 한국선수단 거주 층에 내걸린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이순신 정신’ 글귀 현수막(왼쪽)과 일본 극우단체 관계자가 한국 선수단 선수촌 앞에서 욱일기를 든 채 시위를 하는 장면. 아래는 지난해 9월 14일 아베 총리가 차기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모습. 연합뉴스

1965년 한·일수교 이래로 최악인 한·일관계에 숨통을 틔울 것으로 기대됐던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도쿄올림픽 정상회담이 무산됐다. 두 정상 모두 임기를 3, 8개월 남짓 남겨두고 있다. 과거사 프레임에 매몰된 양국 관계를 개선할 책임은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게 됐다. “지지층의 반일, 반한 정서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한·일 양국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여론에 끌려가고, 여론을 부추기는 삼류 정치 리더십이 두 나라의 가장 큰 리스크 요인으로 재확인됐다. 도쿄올림픽 이후 동북아시아 한·미·일 동맹 핵심축인 한국과 일본의 미래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 결국 무산
과거사에 매몰·여론 눈치
삼류 리더십 결정적 원인

‘제3기 아베 내각’ 스가 총리
‘보수방류 철학’ 계승자
한국 급부상에 우경화 행보

전후 경제부흥 자신감 회복
‘어게인 1964’ 영광 노려
올림픽 직후인 9월 총선
‘日 선수들 정신 승리’ 선전
궁극적으로 개헌이 목표

한국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내년까지 양국 갈등 평행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통 큰 리더십이 필요한 때

우월적 위치에서 대등한 관계로

한·중·일 3국 위상 변화가 동북아시아 정세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일본의 침체기에 중국이 일본을 밀어내고 G2에 들어가고, 한국도 선진국으로 올라섰다. 난징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등 도덕적 가치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으로 높은 위상을 누렸던 일본으로서는 한·중 양국의 부상에 위기감을 갖게 됐다. 그 위기감이 일본 보수 정치권과 영합하면서 우경화 경향을 부추기고 ‘진정한 보수’를 내건 최장기 ‘아베’ 정권을 탄생시켰다.

일본 정치 전문가인 장제국 동서대 총장은 “일본이 경제적 정치적 위상이 떨어지면서 자신감을 잃어간 반면, 한국과 중국이 선진국으로서 대등 혹은 우월적 관계를 차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면서 “국가 간의 위상 변화를 인정하고, 동북아 정세를 풀어야 하는 과도기”라고 현 상황을 분석했다.



스가 내각은 ‘제3기 아베 정권’

2020년 9월 16일, 7년 9개월간 일본 정치 사상 최장기로 지속된 ‘아베 시대’를 계승한 스가 총리는 아베 전 총리, 아소 다로 부총리 등과 함께 정치권 임의단체인 ‘진정한 보수정책연구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된 ‘창생일본’ 회원이다. ‘진정한 보수…’는 ‘2차대전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참배를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정치에서 진정한 보수가 아니다’라고 규정할 정도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집권 초창기인 2013년 야스쿠니신사를 직접 참배해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는 외조부인 만주괴뢰국 고위 관료 출신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1896년생)가 A급 전쟁범죄 피의자로 연합군에 체포된 가족사를 갖고 있다. 1948년 석방 이후 전후 최대 보수정치파벌을 이끌었던 기시 총리와 부친 아베 신타로 외상을 둔 일본 정치명문가 출신인 아베와 자민당 ‘아베’ 파벌의 정치적 야망은 헌법개정과 재무장 등을 통해 ‘보통국가 일본으로의 전환, 과거 영광을 재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이 자랑스러운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헌법개정, 재무장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 교과서 개정 등 1945년 미국에 패배하면서 갖게 된 역사와 헌법, 국가체계를 수정하는 ‘전후 체제에서의 탈피’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시 노부스케(1957~1960) 이후,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2차 집권), 스가 히데요시까지 일본 자민당 ‘보수 방류’ 총리들의 얼굴은 변했지만,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피’라는 일본 보수의 염원과 내셔널리즘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부흥올림픽’ ‘아베올림픽’, 성공할까?

“여성이 많으면 (말이 많아) 회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여성 폄하 발언으로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직에서 사퇴했던 모리 요시로 전 총리. 그는 아베 외조부 기시의 지원을 받아 정치에 입문했다. 아베는 모리의 후원으로 정치 이력을 쌓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베는 총리 취임 직후 ‘정치적 중립성과 자금 확보’를 위해 재계 인사를 회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도쿄도와 일본 올림픽위원회의 주장을 무시하고, 모리를 2014년 조직위원회 회장에 앉혔다. 이후 도쿄올림픽에 아베의 내셔널리즘 정치색이 강하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윤석정 연구교수는 ‘도쿄올림픽과 아베의 올림픽’ 보고서에서 “1964년의 도쿄 올림픽에서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체험했던 아베는 이번 도쿄올림픽 개최로 고양될 민족주의를 동력으로 헌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구상을 밝혔다”면서 “올림픽과 일본 정국이 긴밀하게 연계돼 있다”고 분석했다. 윤 교수는 “아베 총리가 내건 ‘부흥올림픽’도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전쟁 패배의 치욕감을 씻어내 전후 부흥과 경제력 향상을 보여준 기억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소마 망언, 일본의 일관된 입장?

‘제3기 아베 정권’이라는 별명까지 들을 정도인 스가 총리는 취임 이후 가진 국회 연설에서 한국에 대해서는 “건전한 한·일관계를 되찾기 위해 ‘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토대로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겠다”고 짧게 언급했다. 한·일정상회담 무산 직후인 지난 19일 스가 총리는 기자간담회에서 “일한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해 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토대로 한국 측과 의사소통을 하고 싶다”면서 ‘일관된 입장’ 구절을 반복했다. 도쿄올림픽이란 국가적 행사를 앞둔 스가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 측의 해법 제시 없이는 한·일 간 대화가 재개될 수 없다는 것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입장이다. 과거사와 비즈니스를 투트랙으로 따로 협상하자던 가해자 일본의 입장이 몇 년 만에 정반대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소마 주한일본대사관 공사의 부적절한 발언도 양국 정부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 됐다. JTBC와의 대화 중 문 대통령의 한·일 관계 개선 노력을 폄훼하면서 ‘마스터베이션(자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정상회담을 무산시킨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 측은 소마 공사에 대한 처분을 방일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고, 일본은 ‘정상회담과 별개의 문제’라고 대치하면서 ‘손톱에 박힌 가시’로 급부상했다. 일본인답지 않게 평상시에도 사석에서 화통한(?) 어법으로 악명을 떨쳤던 소마의 망언이 코로나 방역 실패로 지지율이 바닥인 스가 정권과 토착왜구 등 반일캠페인으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문재인 정권 양측에 정상회담 리스크를 해결해준 ‘불감청 고소원’이 됐다.



보수화 일본과 한국, 파고 높아질 듯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 김미경 전 교수(사회학 박사)는 “스가 정부는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실시되는 올림픽에서 선수들의 투지를 일본에 투영하면서 코로나19의 역경을 극복한 정신 승리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이라면서 “결국 아베와 스가 총리의 공으로 돌릴 개연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도쿄올림픽 직후에 열리는 일본 총선에서 스가 정권이 우파 결속을 위해 극우적인 정책을 선거 전략으로 삼을 지, 오히려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펼칠 지에 따라 한·일 관계가 크게 요동칠 전망이다. 다만, 일본 자민당 호소다 파벌의 압도적 우세는 당분간 아베로 대표되는 보수 내셔널리즘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년 한국 대통령 선거와 오는 9월 일본 총선 및 자민당 총재 선거 등 바쁜 정치 일정을 앞두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갈등 조정은 미국과 중국, 북한 등 외부적 요인이 폭발하지 않으면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 중론이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임석준 교수는 “양국 정부 모두 서로 존재하는 차이를 차분하게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을 통해 외교적 해법을 도출해야 한다”면서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납득을 받아낼 통 큰 리더십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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