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을 멈추게 하는 건 갑질에 예민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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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2년

네이버 노조는 올 5월 발생한 직원의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 “직장 내 괴롭힘과 이를 방조한 경영진 때문에 발생한 업무상 재해”라고 주장하며 고용노동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7일 네이버 노조의 기자회견. 연합뉴스

직장 내 괴롭힘이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

“통상적인 업무를 벗어난 부분이 있어서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고 있다.”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국회에서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앞서 노동부는 네이버 직원의 극단적인 선택도 직장 내 괴롭힘 사건으로 보고 특별근로감독에 착수했다. ‘직장 내 괴롭힘’이 법으로 금지된 지 2년이 지났지만, 공공기관에서 ‘꿈의 직장’까지 다양한 일터에서 ‘직장 갑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법의 한계가 뚜렷하지만 법의 문제만은 아니다.

네이버·서울대 등 ‘갑질 논란’ 여전
법 시행 후 괴롭힘 신고 1만 934건
검찰 송치·시정조치 14.4%에 그쳐
5인 미만 사업장은 ‘법 사각지대’
조직문화 개선 위한 예방교육 중요
각 구성원도 ‘갑질 감수성’ 키워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아세요

2019년 7월 16일,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와 대응조치를 규정한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다.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 파문, 양진호 한국미래기술회장의 직원 폭행 영상, 간호사 자살을 불러온 ‘태움’ 문화 등 잇따른 ‘직장갑질’ 사건이 법 개정의 도화선이 됐다. 그로부터 2년,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의 올 2분기 직장인 1000명 조사 결과 32.9%가 지난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1년 전(45.4%)에 비해 감소했지만 여전히 세 명 중 한 명 꼴이다.

법의 실효성은 개정 당시부터 비판을 받았다. 처벌 규정이 없고 원칙적으로 사내 자율 해결에 맡겼기 때문이다. 윤미향 의원실에 따르면 올 6월까지 2년간 고용노동부에는 1만 934건의 직장 내 괴롭힘이 신고됐다. 처리 결과를 보면 102건(0.9%)만이 검찰에 송치됐고, 시정 지시(1477건, 13.5%)를 더해도 조치로 이어진 사건은 전체의 14.4%에 불과했다. 그나마 5인 미만 사업장은 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통계에 반영되지도 않았다.

부산노동권익센터 석병수 센터장은 “부산은 5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의 81.6%나 되고, 나머지도 대부분 소기업이라 노동조합 조직률이 전국 평균 12.5%는 고사하고 한 자릿수에 그친다”면서 “현장 노동자들은 법 시행 사실조차 모르거나 알더라도 불이익을 우려하거나 사내 조사를 신뢰할 수 없어 신고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래도 진전은 있다. 우선 폭행 같은 형법상 행위뿐만 아니라 회식, 장기자랑, 심부름처럼 ‘직장생활의 일부’로 용인되던 다양한 괴롭힘이 법률로 들어왔다. 직장갑질119가 분류한 직장 내 괴롭힘의 5개 영역 25가지 유형에는 비하(언어적), 전가·배제·SNS(업무적), 공연·간섭(업무외), 소문(집단적) 등도 포함된다. 국무조정실의 공공분야 갑질사례집을 보면 주말 산행 참석을 강요하거나 예정에 없던 회식에 퇴근한 직원까지 부르고 정시 퇴근하는 직원에게 ‘땡순이’라고 말한 행위 등이 강화된 갑질 징계 규정에 따라 처분을 받았다.

10월 14일부터 시행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개정안에는 사용자 벌칙 조항도 추가된다. 사용자나 사용자의 친인척이 괴롭힘 행위자면 1000만 원,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받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500만 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앞서 올 4월에는 이와 관련해 사용자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판결도 나왔다. 관리과장의 갑질을 신고한 구내식당 조리원을 다른 구내식당으로 전보발령한 것이 불리한 처우인지 판단하는 사건에서 법원은 △신고 관련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전보명령에서 피해자의 의사를 배제한 점 등을 들어 대표이사에게 검찰의 벌금 구형을 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대응 지침과 ‘갑질 감수성’ 격차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면 누구나 사용자에게 신고할 수 있다. 사용자는 피해 노동자 보호를 위해 근무장소 변경이나 유급휴가 명령 등 조치를 하고 객관적인 조사 결과와 피해자의 요청에 따라 징계 등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 가해자가 사용자나 사용자 친인척이거나 사내 조사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 관할 노동청에 진정할 수 있다. 노동청은 근로감독관이 직접 조사하거나 보완조사 등 시정 지시를 내린다.

법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은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①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②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③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부하직원 다수가 팀장을 ‘왕따’시키는 경우도 관계의 우위성에 해당된다. 우위성과 피해는 비교적 명백한데 대개 업무상 적정 범위에 대한 판단이 관건이 된다. 예를 들어 팀장이 직원에게 디자인 시안 보완을 계속 요구한다고 해도 부적절한 행위가 없었다면 업무상 권한에 해당돼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다.” 부산노동권익센터의 설명이다.

대응의 첫 단계는 증거수집이다. 노무법인나래 김기돈 노무사는 “결국 증거를 토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괴롭힘 당한 내용을 감정이 아니라 일어난 사실 중심으로 상세하게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면서 “증거가 없다면 다음 단계로 가기가 어렵다”고 강조했다. 직장갑질119의 ‘직장 내 괴롭힘 대처 10계명’에도 갑질 내용과 시간, 같이 있던 동료, 특이사항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녹음, 동료증언, 문자, 이메일, SNS 등 증거를 남기는 것이 포함된다. 본인이 참여한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법의 실익을 높이는 것은 여전히 과제다. 직장갑질119 조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 경험자 가운데 회사나 관계기관에 신고한 적이 있다는 응답은 5.4%에 불과했는데, 신고하지 않은 이유로는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62.3%), ‘향후 인사 등에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27.2%) 순이었다. 법무법인 시대로 조애진 대표변호사는 “조직 내부에서 상세한 매뉴얼과 교육 과정을 만들고 관련 징계 기준도 마련해야 하는데 조직의 규모나 노동조합의 유무 등에 따라 편차가 클 수밖에 없다”면서 “결국 5인 미만 사업장도 적용하고 근로감독관의 직접조사를 확대하는 등 입법의 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노동과 인권을 존중하는 문화를 위해서는 학교에서부터 관련 교육이 의무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직장 내 괴롭힘 예방 교육조차 권고 사항일 뿐이다. 석병주 센터장은 “지난해 센터 설립 후 직장 내 괴롭힘 예방 강사 양성 과정을 통해 16명 강사가 배출돼 활동하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아직은 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면서 “법 개정에 앞서서 부산시 차원에서 조례 제정 등을 통해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거나 관리 감독을 강화하는 등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구성원 각자에게도 갑질 감수성 지수를 키우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직장갑질119의 ‘직장갑질 감수성 지수’ 조사에 따르면 100점을 만점으로 할 때 반말 항목에서 남녀가 14.3점, 장기자랑에서 20대와 50대가 17.9점, 시간 외 근무에서 사원과 관리자가 10.9점이나 차이가 난다. 성별, 세대별, 직급별 격차다. 직장갑질119가 직장 내 괴롭힘 예방을 위해 배움과 이해, 배려를 제시한 이유다.

조애진 변호사는 “사회 전체의 다각적 노력을 통해 조직 내 세대 갈등을 비롯해 사회구성원들의 인식 격차를 좁히지 못한다면 직장 내 괴롭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김기돈 노무사는 “장시간 노동 등 노동환경이 열악할수록 노동자들이 자신을 지키기 급급해 괴롭힘이 일어나기 쉽다”면서 “개인 차원에서는 동료를 배려하고 노조 등을 통해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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