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막말, 거짓말, 미사여구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임영호 부산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뉴스에는 유독 자주 등장하는 직업들이 있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 장·차관 등 고위 관료, 공기업 대표 등이 그렇다. 모두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인 만큼 언론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언론 보도가 ‘관공서 뉴스’로 도배된 데는 언론의 보도 관행에도 원인이 있다. 뉴스는 팩트에 근거해 작성해야 하는데, 공인의 발언은 인용부호와 출처 표시만 하면 팩트로 간주하는 것이 관행이다. 발언이 권위 있게 인용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직위의 무게감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공인의 발언이 검증 없이 팩트처럼 인용되면서 부작용도 커졌다.

공인 발언 무분별 인용한 뉴스 많아
정치인 막말·알맹이 없는 정책 조장
철저히 검증·평가한 보도 관행 필요
언론 바뀌어야 정치·행정 변화 가능

오늘날 정치인은 막말과 거짓말,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만 남발하는 직업으로 인식되고, 언론은 그러한 ‘헛소리’를 중계하는 공범처럼 각인됐다. 정치인의 막말과 거짓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정치에 갓 입문한 초선의원까지 막말 경쟁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그 징후다. 이처럼 정치가 혐오 대상으로 전락한 데는 언론의 시대착오적인 관행 탓도 있다.

정치 보도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건 공인의 거짓말이다. 올해 정치판을 흔든 가장 큰 이슈는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일 것이다. 국민의 분노가 치솟자 정치인들도 부동산 거래를 검증받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일부 의원들은 난데없이 조사 권한도 없는 감사원에 검증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을 자청했으니 비판과 논란, 철회 등 예정된 순서대로 사태가 진행된 것은 물론이고 언론은 이를 여과 없이 생중계했다. 삼류 코미디 같은 정치다.

막말과 거짓말이 정치인의 상투적 수법이라면 관료는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가 주특기다. 최근 출생률 감소에 따라 대학의 소멸을 우려하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사회 환경이 바뀌면서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이 시대에 낙후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10년, 20년 전에 이미 예측된 교육 관련 현안들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문제를 책임지는 부서인 교육부가 그동안 무슨 일을 해 왔는지는 모르겠다.

교육부는 크게는 대학 설립과 정원 조정부터 예산 배정, 작게는 교내용 서류의 글자 수까지 다 결정하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부서다. 하지만 이 부총리급 거대 부서는 국가적으로 중요하지만 골치 아픈 사안보다는 시시콜콜한 사업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2021년도 교육부 핵심 사업계획에는 ‘비대면 원격교육 운영 지원’ 같은 단기 사업이나 ‘한국판 뉴딜 그린 스마트스쿨’, ‘디지털 혁신 공유대학 사업’ 같이 표현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미사여구만 부각되고 있다. 거창하게 시작한 미래지향적 사업이 영수증과 증빙서류 더미로 끝나는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았다. 물론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다른 시급한 현안을 제쳐 두고 심혈을 기울일 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또 혁신엔 새로운 단기 사업보다 교육 현장과 정부 부서를 망라한 제도개혁이 더 중요한데, 이에 대한 비전 제시도 보이지 않는다. 개혁에는 새것을 더하는 일보다 낡은 틀을 덜어 내는 게 중요하다. 오지랖 넓게 모든 문제에 다 간섭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임무를 외면하는 행태는 관료제 전반의 심각한 문제점이다. 이들은 중요한 현안일수록 시간과 노력에 비해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추진 과정의 갈등만 부각해 담당 부처를 동네북으로 만들까 봐 우려한다. 반면 ‘4차 산업혁명’, ‘미래’, ‘혁신’ 등의 말잔치는 보도자료용으로 안성맞춤이다.

정치든 행정이든 이제는 점차 알맹이보다는 미디어용 쇼에 더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언론 보도는 공인이나 권력기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치인의 행동이나 의제 선택이 정치 세계의 규범이 아니라 미디어 관행에 맞춰 변해 가는 것을 정치의 ‘미디어화(mediatization)’라고 한다. 미디어 시대에 어느 정도 불가피한 추세이긴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게 문제다. 언론이 공인의 발언을 보도하는 이유는 정치나 행정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감시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선 공인의 발언을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후속 보도를 통해 검증하고 평가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막말, 거짓말, 미사여구가 난무하는 것을 막고, 정치인과 관료가 제대로 일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공인의 발언에 대한 검증을 포기한 지 오래다. 검증되지도 않은 원색적 주장을 마구 여과 없이 옮겨 놓고는 언론의 책임 포기를 정파성으로 포장해 정치를 희화화해 버렸다. 이 모든 행위는 언론뿐 아니라 정치,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무관심을 조장하는 원흉이다. 언론 보도가 바뀌지 않으면 정치도, 행정도 변화할 수 없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