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배웅 <6>] “코로나에 막혔던 만남… 가족들 그리워만 하다 떠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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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귀야,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2020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손녀 김민귀(41) 씨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백 살까지는 거뜬히 사실 줄 알았던 박행자 할머니가 손녀의 곁을 떠났다. 예기치 못한 이별은 슬프기보단 당혹스러웠다. 어머니는 전화기 너머로 형제들에게 비보를 전했다. 아버지는 요양병원과 통화하느라 전화기를 붙잡고 계셨다. 도무지 현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TV에선 코로나19 하루 확진자가 또다시 1000명을 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코로나 옮길라’ 발길 멈추자
가족사진 자주 보셨다는 할머니
위암 말기 모셨던 요양병원서
마지막 인사도 못 한 채 이별
얼마나 많은 그리움 삼키셨을지
홀로 가시는 길 외롭진 않았을지
풀리지 않은 응어리 마음에 남아


■느닷없이 찾아온 이별

코로나19 탓에 연말 같지 않았던 2020년 12월 초였다. 미국에 사는 외사촌들이 연말을 맞아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화장실 앞에 쓰러져 계신 할머니를 발견한 건 민귀 씨의 외사촌 동생이었다. 급하게 인근 대학병원으로 모셨고, 가족들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가 위암 말기라고 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으려면 요양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가족들은 고민 끝에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했다. 코로나19 탓에 요양병원 면회를 할 수 없던 때였다. 고민이 됐지만 아흔이 넘은 몸으로 연명치료를 하는 게 할머니를 더 괴롭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새해가 되면 코로나도 잠잠해져서 할머니를 뵐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해를 넘기지 못하고,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먼 길을 떠나셨다.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막내아들이 그리워 급히 가셨을까. 외할머니는 아흔을 넘겨서도, 장애가 있던 막내아들을 살뜰히 챙겼다. ‘막내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 의지 덕분인지 외할머니는 이제껏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셨다. 명절 음식도 척척 해내고, 아침저녁으로 늘 신문과 뉴스를 챙겨봤던 외할머니. 늘 꼿꼿이 그 자리에 계실 것만 같았다.

경황없이 장례를 치르며, 조문객도 받지 못했다. 하루에 1000명씩 확진자가 나오던, 3차 대유행의 절정기였다. 일본에 사는 큰이모네와 외국에 있는 사촌오빠네 가족들도 영상통화로만 할머니의 장례식을 지켜봤다.

슬픔은 뒤늦게 마음을 짓눌렀다. 홀로 가시는 길이 외롭진 않으셨을까. 손녀의 마음엔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남았다.

“민귀야. 할머니 유품에서 네가 쓴 편지가 나왔다.”

외숙모의 말에 잊고 있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민귀 씨가 스무 살이던 해,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난 1년 동안 외할머니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 일본에 사는 큰이모 댁에서 지냈지만, 타향살이는 쉽지 않았다. 민귀 씨는 그 외로움을 외할머니에게 편지를 쓰며 달랬다.

일기처럼 적은 편지는 국제 우편으로 부쳤다. 편지를 받은 할머니는 손녀에게 국제통화로 안부를 전하곤 했다. 세월이 흘러 손녀는 잊었지만, 할머니는 손녀가 꾹꾹 눌러 쓴 편지를 20년 동안 손닿는 곳에 고이 간직하고 계셨다. “할머니가 손주들 중에 민귀 너를 제일 예뻐하셨어.” 외숙모의 말에 민귀 씨의 마음이 조금은 달래졌다.



■그리움만 쌓이네

“코로나 사태가 없었더라면….”

민귀 씨는 코로나가 외할머니의 시간을 멈추게 한 것만 같다. 코로나로 돌아가신 건 아니지만,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이별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계속 맴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더 자주 찾아뵐 수 있었을 텐데. 요양병원에서도 면회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돌아가시기 전 사랑한단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게 아쉽기만 하다.

민귀 씨는 2019년 코로나가 찾아오기 전, 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갔던 때가 그립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외할머니를 모시고 어머니와 함께 4시간이 넘도록 자동차를 타고 달렸다. 장시간 차를 타는 게 고단하실 법도 한데, 지친 기색 없이 아이처럼 좋아하셨던 외할머니의 웃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 후 얼마 뒤 할머니는 민귀 씨 자취방에도 들렀다. 하룻밤 주무시고 가라는 손녀의 제안에 할머니는 평소 챙겨 드시는 사발면과 음료수까지 챙겨 민귀 씨 자취방을 찾았다. 함께 밥도 먹고 TV도 봤던 그날이 외할머니와의 마지막 장면이 됐다.

2020년 코로나가 닥친 뒤로는 행여나 코로나를 옮길까, 발길을 멈춰야 했다. 외할머니도 “잠잠해지면 보자”며 손사래 치셨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는 질기게도 이어졌다.

“괜찮다”고 했지만, 가족들이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코로나 탓에 하늘길이 막히면서 일본에 계신 큰이모도 못 만났다. 서울에 있는 둘째 이모, 부산에 있는 민귀 씨의 어머니와도 마음 편히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외숙모는 할머니가 코로나 시기에 가족사진을 자주 들여다보셨다고 했다.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시며 마음에 드는 사진을 꺼내 액자에다 담아두셨다고. 수천 장의 가족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을 삼키셔야 했을까. 가족들과 인사도 못 한 채 떠나는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할머니가 2020년 초부터 12월까지 1년을 코로나로 집에만 계셨잖아요. 젊은 사람도 너무 힘든데 밖에도 못 나가시고. 그래서 없던 암도 생겼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민귀 씨가 가장 그리운 건 할머니의 방이다. 할머니의 방은 가족들에게 마음의 안식처였다. 민귀 씨는 어릴 적 부모님께 혼나고 나면 자주 할머니 방을 찾아갔다. 그곳에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는 곳. 아직도 할머니의 침대, 화장대, 자개장, 사진들, TV까지. 할머니의 방은 눈 감고도 그려진다. 그곳의 온기까지도.

“무슨 일 있으면 할머니 방에 가서 좀 있다가 오고 그랬거든요. 그런 마음의 안식처가 없다는 거. 상징적인 걸 잃었다는 게 너무 상실감이 커요.”

그래서일까. 민귀 씨의 꿈엔 할머니의 방이 자주 나온다. 어릴 때 봤던 그 방이다. 할머니는 푹신한 전통 방석에 기대 편안한 표정으로 등장하곤 하신다. 꿈에서나마 아프지 않고 건강하신 모습이라 손녀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인다.

민귀 씨와 가족들은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게 가슴에 한으로 남았다. “이렇게 갑자기 이별할 줄 알았더라면 더 자주 연락드리고 찾아뵀어야 하는데….” 후회는 언제나 돌이킬 수 없을 때 찾아온다.

“30대 때는 심심하면 할머니한테 전화했거든요. 용건도 없이 그냥 안부 전화 드렸는데, 최근 5년 동안은 자주 못 했던 것 같아요. 전화를 기다리시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민귀 씨에겐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외할머니.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안아드리고 싶다. “다시 만나면 ‘우리 할머니 사랑해요’ 하고 제가 안아드리고 싶어요.”

민귀 씨는 아직도 외할머니와 이별 중이다. “정신없이 이별하느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늦은 배웅 프로젝트에 사연을 보내고, 인터뷰를 하면서 이제야 정말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것 같아요.” 민귀 씨의 ‘늦은 배웅’은 여전히, 조금씩, 진행 중이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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