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로빈 후드의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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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양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가 ‘신기(神技)’다. 한국 여자 양궁은 단체전이 처음 정식 종목으로 도입된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이번 도쿄올림픽까지 무려 9회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올림픽 양궁 신기록 14개 중 2개를 빼고 모두 한국 선수가 세운 기록이라니 말 다 했다. 양궁 용어 ‘불스아이(Bullseye)’는 과녁의 정중앙에 명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의 올림픽 양궁 경기에서는 생동감 있는 방송 중계를 위해 과녁의 한가운데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런데 김경욱, 박성현 등 한국 국가대표들이 자꾸 한가운데를 맞춰 카메라를 박살 내는 바람에 카메라를 빼고 말았다.

‘불스아이’보다 어려운 게 ‘로빈 후드 화살(Robin hood’s arrow)’이다. 과녁에 꽂힌 화살 뒤에 또 다른 화살이 날아와 맞는 것이다. 영화 ‘로빈 후드’에서 이 장면이 나오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올림픽 같은 큰 무대에서 지름이 1㎝도 안 되는 화살로 화살을 맞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지난달 24일 멕시코와 혼성전 준결승전에서 한국의 안산과 김제덕이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 장면을 시현했다. 이번 도쿄올림픽을 통해 김제덕은 불같고, 안산은 얼음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과 얼음이 만나 새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2020 도쿄올림픽은 최초의 양궁 혼성 단체전이 열린 대회다. 혼성 단체전 신설은 양성평등을 향한 큰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양궁연맹은 이들이 혼성전 초대 챔피언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해당 화살의 기증을 부탁해 왔다. 둘이 합작한 ‘로빈 후드 화살’은 스위스 로잔에 세워진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 박물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그런데 올림픽 양궁 3관왕 안산을 향해 때아닌 혐오 공격이 쏟아지고 있다. 머리카락 길이, 출신 대학, 과거 SNS에 올린 글에 쓴 단어를 보고 일부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딱지를 붙여서다. AFP통신은 “일부 남성이 안산의 머리 스타일이 페미니스트임을 암시한다고 주장했고, 사과와 함께 금메달 박탈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페미니스트 논란은 국제적인 망신이 되고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 이유를 보면서 궁예의 관심법이 생각났다. 페미니스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페미니스트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지…. 국가대표까지 끌어들여 페미니즘 논란을 벌이는 우리 사회와 정치권의 수준이 부끄럽다. 신설된 혼성전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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