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으면 저절로 들리는 세상, 입 다물면 저절로 보이는 나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구례 천은사

아직 오전인데도 무더위는 찌는 듯하다. 두 시간을 달린 자동차도 괴로운 모양이다. 전남 구례 천은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긴 한숨부터 내쉰다. 그나마 해를 가려주는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은 게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무심한 기계라 하더라도 기절해 쓰러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천은사 입구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을 마시고 사찰과 둘레길 산책에 나선다.



“병든 사람 샘물로 치료했다”는 천년 사찰.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 ‘수홍루’ 지나면
배롱나무 반기는 절집. 온갖 숲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묵언의 길’ 거닐고, 저수지 ‘천은제’
가는 ‘상생의 길’에서 물 냄새 나무 냄새 맡으며 자신과 마주하는 고요의 시간 보낸다.


■천은사

더위에 지친 나그네가 측은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소나무들이 천은사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짙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워 나그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지리산 천은사’ 현판이 붙은 정문이 그 뒤로 나타난다. 짙은 녹색으로 덮인 지리산과 푸른 하늘이 아직 두 눈에 남은 고속도로의 열기를 시원하게 식혀준다.

천은사는 신라 시대이던 828년에 창건한 ‘천년 사찰’이다. 처음에는 ‘병든 사람을 샘물로 치료했다’는 전설 덕분에 감로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조선시대이던 1679년 ‘샘이 숨었다’는 뜻인 천은사로 바뀌었다. 이곳은 풍광이 아름다워 2018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천은사로 들어가려면 이색적인 사진명소로 유명한 수홍루를 지나야 한다. 아치형 콘트리트 다리 위에 세워진 이층 누각이 주변의 나무들에 뒤덮여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서 찍은 사진 한 장만으로도 벌써 마음은 시원해진다.

사천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보제루를 지나자 돌계단 위에 수줍게 자리를 잡은 극락보전이 나타난다. 화려하고 웅장한 가람은 아니다. 적당한 규모에 소박하면서 차분하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큰 바위가 놓인 팔상전, 응진당 앞의 좁은 마당에는 이제 활짝 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환하게 웃고 있다. 햇살에 밝게 비치는 분홍색 꽃이 부처의 붉은 볼처럼 수줍게 느껴진다. 명부전 앞에서는 수령 300년가량 된 보리수나무가 차분하게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다.



■묵언의 길

‘침묵하면 세상이 보이고 묵언하면 내가 보인다.’

천은사 주변에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묵언의 길’이 있다. 절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수홍루 오른편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절에 들어가 뒤쪽으로 올라갈수도 있다.

절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절 뒤쪽으로 ‘묵언의 길’에 들어간다. 길 초입에는 천은사를 지키는 300년 된 소나무가 담담한 표정으로 산책객에게 방향을 안내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 소나무처럼 천은사 일대에는 고목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대부분 땔감 등으로 벌채돼 사라져 버렸다. 주변에 흩어져 자라는 작은 소나무들은 당시 베어져 사라진 고목의 자손들이다.

소나무를 지나면 작은 나무덱과 다리가 나온다. 다리 아래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절 아래의 저수지를 향해 졸졸 흐르고 있다. 그늘이 진 바위 사이에 맑게 고인 물이 나그네를 유혹한다. 코로나19가 아니라면 다리 밑으로 내려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시원한 물에 두 발을 담그고 싶은 심정이다.

다리를 건너면 소나무와 각종 잡목으로 이뤄진 숲 사이로 깔끔하게 정비된 산책로가 개울을 따라 이어진다. 잠시 걷다보면 개울을 내려다보는 모퉁이에 ‘명상의 쉼터’가 나타난다. 안락의자에 잠시 편안히 등을 기대 잠을 자거나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의자에 누워 깊이 잠든 사람도 있다.

찌르르르! 졸졸! 솨~솨!

새소리, 개울의 물소리,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 등 다양한 숲의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코도 간질인다. 안락하게 휴식하는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어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 소리가 없다는 게 이렇게 평화로운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상생의 길과 천은제

묵언의 길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다시 수홍루를 건너 왼쪽으로 꺾으면 저수지 천은제를 둘러보는 ‘상생의 길’이 나온다. 천은사, 환경부, 전남도, 국립공원공단 등 8개 시설, 기관이 뜻을 모아 만든 길이다. 2020년 11월에 개장한 길이니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상생의 길 입구로 들어가면 나무덱이 설치된 산책로가 나타난다. 한쪽으로는 푸른 저수지의 물 냄새가, 반대쪽으로는 짙은 숲의 나무 냄새가 얼굴을 간질인다.

짙은 남색을 띤 호수 수면 위를 푸른 하늘이 뒤덮고 있다. 그 사이로 하얀 뭉게구름이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천천히 바람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아주 느리게 걷고 있는 구름을 보면서 입구에 달린 안내문 문구를 떠올린다.

‘바쁘게 달려오던 삶의 속도에 제동을 걸고 잠시 멈추어 보십시오. 자신을 마주할 고요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무덱 산책로는 굴곡이 심하지 않아 걷는 게 전혀 힘들지 않다. 강렬한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아 더위를 느낄 이유도 없다. 햇살이 사라진 공간에는 저수지 물기를 담은 선선한 바람이 돌아다니고 있다.

산책로는 그다지 길지 않다.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좀 더 여유를 갖고 싶으면 아무 생각 없이 저수지를 바라보며 산책로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 멍하게 앉아 있으면 된다. ‘묵언의 길’에서 안락의자에 누워 잠시 눈을 감던 것과 다른 분위기에 젖을 수 있다.

산문 쪽 산책로가 끝나면 제방이 나온다. 저수지를 배경으로 좋은 사진을 찍기에는 이곳이 가장 좋은 ‘포인트’다. 제방을 건너면 카페 ‘천은사에서’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나무덱 산책로가 다시 이어진다. 이렇게 해서 천은사 여행은 막을 내린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천은사 입구에 소나무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위 사진). 천은사로 들어가는 입구인 수홍루.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