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22. 사냥을 키우는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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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등교 도중에 있었던 그와의 언쟁은 전혀 우리의 잘못입니다.→등교 도중에 있었던 그와의 언쟁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인터넷에서 본 글인데, 앞 문장이 비문이라며 고쳐야 한다고 했다. ‘전혀’는 부정을 나타내는 말과 어울린다고…. 하지만, 아니다. ‘전혀’에는 ‘全혀(도무지)’ 외에 ‘專혀(오로지)’라는 뜻도 있기 때문. 그러니 첫 문장은 바른 문장일뿐더러 오히려 더 강한 표현인 것. 하지만 아래 책 제목은, 비문이다.



짐작건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겁이 나서 그랬다는 뜻일 터. 그렇지만 어쨌거나 서술어 ‘나다’가 ‘겁’은 꾸밀 수 있어도 ‘스트레스’를 꾸밀 수는 없으므로 비문이 될 수밖에 없다. 아래 기사 제목은 어떤가.



다양한 합병증을 동반하는 건 ‘심장질환’이겠지만, ‘심장질환 치료법’까지 꾸밀 수도 있어 모호한 제목이 되고 만 것. 쯤이면 어땠을까.

‘어윈커인은 중국 북방의 따싱안링 산맥 깊은 숲 속에서 사냥과 순록을 키우며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그림책 에서 본 구절인데, 역시 비문이다. ‘키우며’가 ‘순록’뿐만 아니라 ‘사냥’까지 꾸미기 때문이다. ‘사냥을 하고 순록을 키우며’쯤이면 좋았을 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묘에는 조개껍데기와 조약돌이, 자드킨 묘에는 촛불이, 베케트의 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소설가가 한 신문에 쓴 글인데, 역시 서술어를 잘못 쓴 비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묘에는 조개껍데기와 조약돌이, 자드킨 묘에는 촛불이 있었지만, 베케트의 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를 잘못 쓴 것일 터.

‘왕의 식탁은 늘 호기심의 대상이다. 길거리에서 파는 1000원짜리 볶음면조차 맛있는 나라 태국 왕실의 식탁이라면 더욱 궁금하다.’

이 문장에서는 ‘맛있는 나라’가 ‘태국’을 꾸며야 하는데, ‘태국 왕실’을 꾸미는 판. ‘맛있는 나라 태국의 왕실 식탁’쯤이면 정리가 된다. 사람살이도 그렇지만, 글 쓸 때도 적당한 여유가 필요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및 감염예방을 위한 방송국 위생 살균소독 방역작업’이라는 문장도 마음이 급해서 꼬인 사례. ‘바이러스 확산을 위한’이라니…. 아래처럼 쓰면 괜찮았을 터.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방지, 감염 예방을 위한 방송국 위생 살균소독 방역작업.’

아니, 그래도 괜찮지는 않다. 바이러스는 균이 아니어서 ‘살균’할 수 없기 때문이다.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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