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그들의 빛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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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70세 제주 해녀 진옥과 30대 PD 경훈의 사랑 이야기”. 이 문구를 보았을 때 그저 그런 멜로영화라고 생각했다. 영화 홍보 또한 멜로에 집중되어 있는 데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랑 이야기는 이젠 새로울 게 없다고 단정했다. 영화보기를 망설인 이유다. 영화가 개봉하고 한 달 쯤 지나 우연한 기회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사실 영화를 본 이유는 ‘고두심’이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엄마’ 역할만 주로 맡던 그녀가 이번 영화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니 그 모습이 어떨지 내심 궁금했다.

고두심이 연기한 ‘진옥’에게서는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사랑에 빠진 설렘 가득한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칠십 평생 동안 이런 행복이 자신에게 찾아온 것을 믿을 수 없어 하다가도, 현실로 돌아와서는 당혹스러움과 민망함이 교차하는 얼굴까지. 아마도 고두심이라는 배우가 아니었다면 그릴 수 없었을 얼굴임이 분명했다.

고두심 연기 70대 해녀 ‘진옥’
30대 다큐 PD와 사랑에 빠져
바다 매개로 서로의 상처 위로

소준문 감독 영화 ‘빛나는 순간’
진옥의 삶과 제주 역사 겹쳐져
잊지말아야 할 기억 일깨우기도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제주 해녀 ‘진옥’의 삶을 다큐로 제작하기 위해 경훈이 제주도로 찾아오지만 진옥은 귀찮다며 인터뷰를 거절한다. 착한 진옥이 이토록 매몰차게 구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까지 그녀를 찾아온 외지사람들이 해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경훈도 이를 아는지 매일 같이 진옥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쓴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에 빠진 경훈을 진옥이 구해주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사실 소준문 감독의 ‘빛나는 순간’은 진옥이 오랜 거절 끝에 다큐를 찍기로 하면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있지 않다. 각각의 상처를 품은 그들이 나이를 초월해 진심을 나누고, 그 상처를 ‘위로’하는 그 순간에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아픔을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나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이를 만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은 가슴 밑바닥에 숨겨두었다가 홀로 아파할 뿐이다. 진옥은 바다에서 딸을 잃었고, 경훈 역시 연인을 바다에서 잃었다. 소중한 이를 바다로 떠나보낸 두 사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아픔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존재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어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는 격정적인 사랑은 아니다. 하지만 우정이나 치유도 혹은 연민도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로 인해 서른세 살의 나이차의 사랑은 불편하거나 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귀엽고 아름답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빛나는 순간’은 표면적으로는 서른세 살의 나이 차이를 지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내는 보이지만 그 속내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특히 영화는 제주가 가진 아픔까지 다가가고 있어 특별하다. 진옥은 제주의 아픔인 동시에 자신에게도 고통의 시간으로 남겨져 있는 4.3사건을 경훈에게 쏟아내듯 읊조리는데, 이 장면은 가히 압도적이다. 결국 영화는 사랑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상군 해녀의 삶과 제주 4.3 사건까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일깨우는 데 의미를 둔다.

또한 제주도 조용한 해안 마을을 품는 카메라는 보는 내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그것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드는 감정이 아니다. 카메라는 제주도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과 슬픔을 먼저 들여다본다. 풍경은 ‘사람’이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려주는 ‘빛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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