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소아시아 기행] 죽음의 푸가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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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자

‘죽음의 푸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지속적인 충격은 그 시가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때로는 명백하고 직접적이며 때로는 넌지시 빗대거나 숨기고 있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기호들에서 비롯된다. 이번에는 파울 첼란의 시에 등장하는 두 여인, 마르가레테와 술라미트를 통해, 아니 이 두 여인을 그린 그림을 통해 이 시가 감당하고자 했던 두 책무, 곧 아우슈비츠에 대한 증언과 유대·기독교 문명에 대한 고발에 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전후 독일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미술가 중에 안셀름 키퍼가 있다. 키퍼는 해방전후사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신의 추상적인 주관 세계나 형식의 문제를 건드리는 한국의 화가들과는 달리, 독일인이라면 도망칠 수 없는 그들의 역사를 시종일관 직시하면서 격렬하게 다루고 씨름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 활동은 한마디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아, 문화적 실천 속에서 각인되고 협상되는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고고학적 탐구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경험한 파울 첼란의 시
이를 껴안는 안셀름 키퍼의 미술
역사의 증언과 유대·기독교 문명 고발
전후 독일 ‘반성과 성찰’ 화두 실천


그의 미술 작업이 독일의 가장 어둡고 야만적인 역사적 시기를 고발하고 있는 첼란의 시 세계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테다. 2005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그는 대형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회 제목이 ‘파울 첼란을 위하여’였다. 그러나 오늘의 두 여주인공 마르가레테와 술라미트를 위한 그림은 오래전에 그려졌지만 이 전시회에 포함되지 않았다.

안셀름 키퍼는 1977~80년의 ‘성상 파괴’ 논쟁 연작을 거쳐 1980년대 초에 마르가레테와 술라미트의 그림들을 생산한다. 나는 성상 파괴 논쟁 연작을 거친 후에 마르가레테와 술라미트의 그림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작품 제작 순서가 의미하는 바가 많다고 본다. 이건 아우슈비츠를 증언해야 하되 십계명의 제2조를 위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증언을 해야 한다는, 비단 파울 첼란뿐만 아니라 유대인 증언자라면 모두 다 인지하고 있는 이른바 ‘증언의 어려움’을 키퍼가 깨닫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그려지는 마르가레테와 술라미트의 그림은 여러 본이 존재한다. 마르가레테 그림들은 전형적으로 특정 형태로 배열된 밀짚 더미들로 구성되어 있다. 첼란의 시에 등장하는 수용소 소장의 그녀이자 괴테의 그녀이며 하이네가 노래한 ‘로렐라이’이기도 한 마르가레테는 금빛 머리의 소유자로 독일 내지 북유럽의 여성을 대표한다. 안셀름 키퍼는 그림에서 마르가레테를 밀짚으로 구현하고 비유한다. 밀짚은 순수한 물질성 그대로의 독일적 풍경이며 이와 동시에 금빛 머리로서,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 자부심 즉 독일의 정체성이 토착적이고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땅으로부터 출현했다는 것을 도상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마르가레테 그림의 그 눈부신 색채, 평면성, 직물 같은 물질성, 눈에 확 띄는 현존성이나 존재감은 술라미트 그림에 묘사되어 있는 공허하고 어두컴컴하며 동굴처럼 움푹 들어간 공간과 큰 대조를 이룬다. 술라미트 그림에서 키퍼는 둥근 천장이 있는 벽돌의 방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3제국의 대표적 건축가 빌헬름 크라이스가 설계한 ‘독일 전쟁영웅들을 위한 영묘’의 의도적인 모방이다. 키퍼는 이 그림에서도 납골당같이 방 안쪽으로 원근법적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공간을 연출하는 바, 이것이 그가 나치의 건축물을 불러내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 움푹 파인 곳은 엉켜 있는 불꽃으로 이어지면서 유대교 회당의 장식 촛대를 환기하고, 그런 다음에 이 공간이 기념하는 대상이 독일 전쟁영웅으로부터 유대인 희생자들로 변모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덮개, 검댕, 그을음, 재의 잔여물 등이 그림의 상부를 덮고 있고, 왼쪽 위의 구석에 흰색 물감으로 작게 쓴 술라미트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여기에 이름의 언어적 기입을 통해서 마르가레테의 타자, 구약성서의 ‘아가서’에 단 한 번 나오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죽음의 푸가’에 묘사되고 있듯이, 유럽 유대 민족의 파멸에 대한 영원한 잿빛 상징으로 변형된다.

‘너의 황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 술라미트.’

이 시 전체에 걸쳐 서로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던 쌍둥이 같은 두 모티프는 줄곧 시행을 달리하며 어긋나다가 시의 마지막에 합류한다. 그러나 화해나 협화음이 아니라 불협화음 속에서, 종결 없는 결미같이, 재로 새까매진 술라미트가 ‘죽음의 푸가’의 마지막 시어가 되었다. 나치즘이 그토록 지워 없애려고 한 뿌리 깊은 정체성을 꼭 붙들고서 말이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라미트여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아가서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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