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다방, 커피 매개 사교·정보 교환·문화 창달의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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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커피도시다] (2) 광복동 시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한국에 등장하기 시작한 다방은 1990년대 커피숍, 2000년대 카페에 자리를 내주기까지 커피를 매개로 한 사회적 공간이자 사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미국 공보처, 다방 554곳 조사
“커뮤니케이션 중심지였다” 결론
항구 주변인 중구에 대부분 집중
입출항 정보 나누고 예술 논해
60~80년대엔 생활 밀착형 진화


■미국 공보처도 주목한 부산 다방

다방이 사회적 장소였다는 사실은 미국 공보처(미 정보국·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USIA)가 1970년 4월 1일 발간한 ‘Tea rooms and communication in Korea(한국의 다방과 커뮤니케이션)’라는 제목의 보고서에도 잘 드러난다. 1968년 1월 3주에 걸쳐 부산에 있는 다방 554개를 전수 조사한 결과를 추린 12쪽짜리 짧은 보고서다.

지역 문화 독립연구자인 김만석 작가는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다방을 주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며 “서울에는 다방 수가 많아 전수 조사가 어려우니 부산을 대상으로 했고 부산대 사회학과 학생들을 동원해 조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보고서는 한국의 다방이 영국의 ‘펍’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커피 하우스’ 같은 역할을 한다고 묘사하면서, USIA의 해외 조직인 미국 공보원(USIS)이 미국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다방을 커뮤니케이션의 장소로 활용해도 좋을 것 같다는 제안으로 끝난다.

부산 다방 조사는 554개 다방을 모두 방문해 예비 조사를 하고 그 중 부산을 대표할 만한 78개의 다방을 선정하며 출발한다. 이어 78곳 다방 마담과의 인터뷰, 다방 레지 120명과의 인터뷰, 다방 손님 309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다.

보고서는 당시 부산의 구별 다방 분포도부터, 다방 방문 목적, 다방 마담과 레지의 특성(나이, 혼인여부, 교육 수준, 출신지), 다방 손님들의 특성(나이, 성별, 직업, 교육 수준)을 보여주는 표물을 첨부해 다방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분석에 따르면 부산에서 다방의 가장 많이 몰려있던 곳은 번화가인 중구로 554개소 중 절반을 차지했다. 당시 손님의 72%가 50세 이하였고, 88%가 남성, 57%가 사업에 종사했으며 고졸자가 30%, 대졸자가 53%였다.또 마담은 기혼이 47%로 미혼 21%보다 많았지만, 레지의 경우 96%가 미혼이었다.

이 보고서는 40년 가까이 비공개 문서였다가 기밀이 해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의 다방이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사교의 장소’이자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지’,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는 장’의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문화와 예술, 생활의 중심지 다방

미 공보처 문서가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다방과 부산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항구 도시이자 한국전쟁 때 피란수도로 자연스레 다방이 자리 잡았다. 다방은 사람이 모이는 대표적인 장소가 됐다.

부산 커피사 연구를 하고 있는 부산학당 이성훈 대표는 “영국의 세계적인 보험사인 로이드가 커피 하우스 즉 다방에서 시작된 것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예전에는 항구 주변의 다방에서 입출항 정보를 교환했다”며 “자갈치, 광복동을 비롯한 항구 주변에 다방이 많이 생겼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부산은 한국전쟁으로 피란수도 역할을 하면서 문인, 화가 같은 예술인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예술 활동을 하는 다방 문화가 꽃피었다. 당시 그 세태를 가장 잘 드러낸 소설이 김동리의 단편 ‘밀다원 시대’(1955)다. 김동리 황순원 김말봉 같은 기성 문인이 주로 활동하던 밀다원다방, 박인환 김경린 이봉래 같은 신진 시인과 이중섭 이준 김환기 화백이 자주 찾은 금강다방까지 다방은 그 시절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1960~1980년대의 다방은 좀 더 생활 밀착형으로 변했다. 미 공보처 보고서처럼 사교와 정보 교환이 주 목적인 장소로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사실 커피가 다방 문화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이상길 향토자료수집가는 “당시 다방은 모든 생활 문화의 중심이었다”면서 “TV가 귀한 시절이었던 70년대에는 다방에 모여 ‘박치기왕’ 김일의 레슬링 경기를 보곤 했다”고 회상했다.

70년대 다방 마담과 레지는 시대를 대변하는 독특한 존재였다. 손님과 대화가 가능해야 했기에 어느 정도 학력과 교양을 갖춰야 했다. 부산반도호텔 관리부장으로 일했던 김광식 수필가는 “반도호텔 주변에도 다방이 매우 많았는데 다방에서 한복을 입고 있으면 마담, 양장을 하고 있으면 레지였다”면서 “레지의 경우, 애인이 있으면 손님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쫓겨날 정도로 연예인급 인기를 누렸다”고 전했다. 역시 다방은 사회적 공간이었다.

조영미·이현정 기자 mia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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