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OTT와 영상산업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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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배우·경성대 교수

“인혜야, 이따 4시 40분에 잊지 말고 권투경기 녹화해놔야 한다.” 보고 싶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아침 일찍부터 엄마와 외출하셔야 하는 아빠의 신신당부가 떨어졌다. ‘12시 30분’, ‘2시’, ‘2시 30분’…. 점심을 먹을 때에도, 숙제를 할 때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틈틈이 시간 체크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살면서 아빠에게서 떨어진 첫 번째 임무 수행이었기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과거 TV 프로그램 본방 사수는 필수
가족 간 치열한 채널 싸움 비일비재

개인형 맞춤식 텔레비전 IPTV 등장
원하는 프로그램 언제나 볼 수 있어

부일영화상 OTT 영화 작품상 후보로
영화·드라마 개념 송두리째 변해

그런데 갑자기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혜야, 모해? 놀러 가자.” 갑작스러운 친구들의 들이닥침이 화근이었다. 무더운 여름 방학이었던 터라 시원하게 물놀이 가자며 친구 3명이 찾아온 것이다. 집 근처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냇가가 있었는데 친구들과 수다 떨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얕은 물가 쪽 큰 바위에 쪼르르 앉아 물속에 발을 담그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살짝 지루할 때쯤이면 자연 소품을 활용해 각양각색의 소꿉놀이를 즐기다 보니 시간의 흐름도 잊었다. 결코 녹화 시간을 놓치지 않으리란 사명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 인혜 녹화 잘했어?” 녹화영상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왔던 아빠의 기대에 찬 표정과 녹화본이 없단 사실을 알아챈 후 애써 참으려는 아빠의 아쉬운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청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방송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앞에 바짝 붙어 있어야 했던 옛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방송국에서 재방송을 해 주지 않으면 프로그램을 절대 다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본방 사수’는 필수였다. 인기 많은 드라마 방송 시간이면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도 나중으로 미룬 채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할 때면 전국 수도 사용량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가족마다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다른데 같은 시간대에 방송하는 경우에는 치열한 채널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원하는 프로그램을 내 시간에 맞춰서 언제든 시청 가능한 세상이 왔다. 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의 등장으로 개개인의 맞춤식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방송국에서 정해 주는 프로그램 방영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의 스케줄에 맞춰 시청 시간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IPTV 안에는 현재 방영 프로그램들이 다 들어 있어 별도의 녹화 없이 시청이 가능하다. 몇 년 전 방송된 프로그램도 있어 과거 방송까지 편하게 시청할 수 있다. 또한 원하는 프로그램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TV 앞에 앉아서 시청해야 한다는 건 옛이야기이다. 운전하며 이동하다가 차 안에서 방송을 보고 친구랑 수다 떨다가 커피숍에서 핸드폰으로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한강이나 공원 등 분위기 있는 야외에서도 노트북으로 TV를 본다. 거실 중앙에 있던 큼지막한 텔레비전 앞이 아닌 야외 어디에서도 방송보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인터넷만 가능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영화 관람도 가능해졌다. 현재 개봉된 영화에서부터 과거에 상영되었던 영화뿐 아니라 국내에서 상영되지 않았던 세계 각국의 영화까지 편리하게 시청할 수 있다. ‘억수로’ 보고 싶었던 영화가 극장에 개봉되었단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가 티켓 예매를 하지 않아도 된다. 같은 시기에 여러 영화가 연이어 개봉할 때면 극장에서는 각 영화의 상영 기간을 전체적으로 짧게 잡고 영화를 빨리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설사 그렇다 해도 조바심 낼 필요가 없어졌다. 인터넷으로 접속만 하면 내가 원할 때에 즉각적으로 관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OTT(Over The Top)의 등장으로 극장 개봉이 아닌, 온라인 개봉 영화도 증가하고 있다. 드라마는 TV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선입견을 깬 획기적인 일이다. 인터넷과 새로운 매체의 등장이 영화와 드라마의 개념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이제 영화는 구수한 팝콘과 버터구이 오징어를 먹으며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인터넷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화도 탄생했다. 이를 두고 인터넷 상영 작품을 영화로 인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영화상인 ‘부일영화상’ 측에서 극장 개봉작이 아닌 OTT 영화도 작품상 후보에 포함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미 해외에서는 OTT 영화를 인정하여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작으로 등장하고 있다. 미국 방송업계에서 권위 있는 시상식으로 불리는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는 OTT 드라마가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는 10월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부디 넓은 시야를 통해 영화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에 발맞춘 다양한 영화들이 선보이는 장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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