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표준어의 방언 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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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 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 공모 칼럼니스트

며칠 후면 575돌 한글날이다. 이맘때가 되면 ‘지나친 외래어 사용이 우리말을 파괴한다’, ‘세종대왕님이 하늘에서 통곡하신다’,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라는 언론의 보도나 칼럼 등이 연례행사처럼 쏟아진다.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한글에 대한 자부심과 일제강점기 말살당할 뻔했던 우리말에 대한 민족의식이 결합하여 외래어를 우리말로 순화해 사용하자는 주장은 언어 사용 현실과 상관없이 신성시된다. 그러나 많은 언론과 사람들이 외래어 유입으로부터 우리말을 지키자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어문 정책이 우리말을 위협하는 상황에는 무관심하다.

한글날 무렵 우리글 사용 장려 봇물
하지만 정부 어문 정책이 더욱 위험

표준어 강조로 지역어 다양성 소멸
효율성 기준은 언어 제국주의 논리

방언도 차별 없는 공통어 정책 필요
조속한 공론화로 국어 외연 넓혀야


어문 정책이 우리말을 위협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우리가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표준어 정책이 도리어 우리말을 포식하고 있다. <표준어 규정> 제1장 제1항에 따르면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다. 서울말을 표준어로 정의함으로써 서울 외 다른 지역의 방언은 비표준어가 되어 버린다. 표준과 비표준은 표준어와 방언의 관계를 규범과 비규범, 맞고 틀림, 우(優)와 열(劣)의 관계로 보는 이데올로기로 강화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방언을 바르지 않다고 인식해 사용을 멀리하게 된다. 표준어 정책이 소중한 우리말 지역 방언을 압살하는 셈이다.

우리나라 표준어 정책은 1912년 일제가 통치 효율화를 위해 공포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의 ‘경성어를 표준어로 함’이라고 한 규정에서 시작됐다. 한편 조선어학회도 독립을 위해 민족 구성원을 결속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표준어 사정을 하였는데, 그 결과로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간행됐다. 이후 6·25 전쟁이 끝나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투리는 전근대적 요소로 간주됐고, 문교부에서 1988년 <표준어 규정>을 고시하면서 표준어 사용이 공공연히 강제되었다. 국가주의 산물에서 시작된 표준어 정책이 근대화의 도구로 발전한 것이다.

표준어 정립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는 언어 기준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표준어 정책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 계몽과 결집, 사회 발전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선 표준어 정책으로 인한 실익이 방언 보존이라는 가치보다 더 큰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방언은 지역의 고유한 생활, 문화,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다. 방언을 통해 우리 민족과 문화의 형성,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방언을 보존함으로써 우리말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어휘의 폭도 넓힐 수 있다. 반면 과거와 달리 구성원 간 의사소통에 장애가 없는 오늘날, 표준어 사용 강요로 인한 실익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의사소통, 교육, 사회 발전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근거로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말과 글을 버리고 영어를 국어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월드와이드웹(www)을 조사하는 기관인 ‘W3테크(W3Techs)’의 데이터에 따르면 전체 인터넷에서 영어로 된 콘텐츠가 62.8%를 차지한다고 한다. 반면 한국어 콘텐츠는 0.5%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를 기준으로 효율성과 경제성을 따진다면 한국어라는 방언을 버리고 영어라는 표준어를 받아들이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위해 낫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영어의 식민지가 되자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것처럼 표준어 제국주의에서 지역 방언을 지켜 내야 한다.

표준어가 방언을 포식하는 상황을 막자고 하는 것이 곧 표준어 정책을 일거에 폐기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 표준어의 외연을 넓혀 공통어(common language) 정책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즉 현재 표준어가 갖는 ‘교양 있는’과 ‘서울말’이라는 외연을 무너뜨려 언중이 실제 즐겨 사용하는 일상어, 지역 방언에도 온전한 자격을 부여해 차별 없이 널리 쓰게 하자는 것이다. 표준어 정책에서 공통어 정책으로의 전환은 표준화에서 다원화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말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언중의 선택권을 넓힐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통어 정책으로의 전환은 ‘언어 민주화’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 지역 젊은이들은 취업 면접에서 방언 사용으로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해 표준어 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표준어로 인해 방언 사용자가 차별받고 방언이 소멸하는 오늘날의 모습이 과연 575년 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하며 꿈꾸었던 미래일까? 하루빨리 공통어 정책에 대한 공론화를 시작해 언중이 많이 사용하는 지역 방언을 공통어에 우선 등재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지역 방언을 보존하고, 국어 다양성을 확보하며, 언어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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