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평화의 전제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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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평화상은 인류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수상한 것을 비롯해 주로 정치 지도자가 받았다. 2021년 노벨 평화상은 뜻밖으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언론인들에게 돌아갔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민주주의와 항구적인 평화의 전제 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대해 상을 수여하기로 했다”고 밝힌 점이 의미심장하다.

필리핀 〈래플러〉 설립자 마리아 레사와 러시아 〈노바야 가제타〉 설립자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올해의 수상자다.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로 손꼽히는 필리핀과 러시아에서 천신만고 끝에 피운 꽃이라고 하겠다. 필리핀에서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집권 이후 살해당한 언론인만 12명에 달한다. 하지만 두테르테는 기자들이 부패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두테르테 정권의 ‘마약과의 전쟁’에 대해 노벨위원회는 “사망자 수가 너무 많아서 이 캠페인은 자국민들을 상대로 한 전쟁과 유사하다”라고 할 정도다. 〈노바야 가제타〉는 1993년 설립된 이래 비판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6명의 기자가 살해됐지만, 이 신문의 논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2012년 설립된 〈래플러〉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로 극심한 언론 탄압을 받았다. 필리핀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법인 등록을 취소하고, 검찰이 조세 포탈 혐의로 기소해도 이들은 버텼다. 기자들이 대통령이 참여하는 모든 행사를 취재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있었다. CEO 겸 편집국장인 마리아 레사는 사이버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10회 이상 체포되었다. 또한 그는 전직 판사와 기업인 비리를 폭로한 기사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래플러〉는 지금도 대통령 지지자들의 온라인 공격, 필리핀 정부와 유력 기업과의 소송전에 시달리고 있다.

레사 기자는 “팩트 없이는 진실이나 신뢰를 추구할 수 없다. 내년 필리핀 대선은 팩트의 싸움터가 될 것이다. 우리는 대중들이 팩트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위협이나 괴롭힘에 굴복해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기자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 노벨위원회는 언론의 자유가 점점 더 불리한 조건에 직면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가짜 뉴스 단속을 이유로 여당이 언론중재법을 강행 처리하려고 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민주주의와 평화의 전제 조건에 대해 서로가 깊이 생각할 때이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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