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지식인과 ‘지식 기술자’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논설위원

대선 정국·국정감사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대장동 개발 사업 특혜·로비 의혹을 지켜보면서 참담했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부동산 개발이익 규모가 수조 원대에 달한다는 사실과 공공에 돌아가야 할 막대한 이익은 토건 세력과 권력자들의 배만 불려 주었다는 불편한 진실이 그랬다. 그리고 ‘니가 거기서 왜 나와’라는 유행어가 생각날 만큼 법조·언론·정치 카르텔이 호명되는 현실이 서글펐다.

일찍이 장 폴 사르트르는 이란 책에서 ‘지식인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특정 분야의 지식만을 쌓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선을 대변할 수 있느냐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만약 그 지식인이 기능적 지식인의 위치에 머무른다면 부르주아라는 특정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일 뿐 보편적인 지식인이 되지는 못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대장동 핵심 4인방의 이름과 직업이 불릴 때마다 괜히 뜨끔뜨끔했다. 부끄러움 때문이다.

대장동 4인방·윤석열 ‘전두환 발언’
지식 갖춘 전문직업인 민낯 ‘씁쓸’

종합 사고 못하면 한낱 ‘기술자’ 전락
조선시대 율관 ‘중인’인 이유도 주목

‘지식 기술자’ 꾐에 빠지지 않으려면
대선 후보 못지않게 국민도 노력을



그런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한술 더 떴다. 지난 20일 부산을 찾아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각계에서 비난이 빗발쳤지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버티다가 등 떠밀리듯 하루 만에 사과가 아닌 유감의 뜻을 밝혔다. ‘가방 끈’과 지식의 정도가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명색이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찰총장까지 지낸 분이지 않던가. ‘서울의 봄’과 5·18 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인권 탄압의 역사를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말이다.

언젠가 페이스북 지인도 “대한민국에선 시험 잘 치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자들에게 자유선택권이 너무 많이 주어지는 게 문제”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때도 윤 후보의 주택청약 통장이나 부정식품 같은 실언이 잇따르고 있었는데, 틀린 말도 아닌 듯해서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실언도 한두 번이지, 본성을 감추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한때 개인적인 관심이었지만, 조선시대 신분 계급인 중인에 대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다. 철저한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만 해도 사회를 주도했던 핵심 지배층은 대부분 문과 출신의 사대부였다. 한데, 풀리지 않은 의문 가운데 하나가 의료(의원), 법률(율관), 금융(계사), 외교(역관), 천문지리(음양과) 같은 전문직은 왜 중인이란 계급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였다. 그렇다. 중인은 평생 한 분야에만 종사했기 때문에 전문성은 강했지만, 문사철을 겸비한 사대부에는 미치지 못했다. 자기 분야에 갇혀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는 시야가 좁았다. 그래서 한낱 ‘기술자’로 치부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지금이 조선시대는 아니지만, 한낱 ‘기술자’에 불과한 행태를 보이지 않으려면 개인적으로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지식인을, 혹은 기술자를 깎아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지식인이 지식인답지 못할 땐 경우가 다르다. 그러니까 지식인은 지식 전문가 그룹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지식이 특정 계급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보편성을 획득할 때만이 비로소 효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치며 읽었던 지식인과 학자를 구분한 예시가 생각난다. 완벽한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핵분열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을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학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 학자들이 그들의 연구로 만든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위력에 놀란 나머지, 핵무기의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하면 비로소 그들은 지식인이 된다.

중요한 대목이다. 전문직업인이자 기술자로서의 지식인이 아닌, 철저한 비판 의식을 지닌 지식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요구이다. ‘행동하는 지성’ 놈 촘스키는 ‘지식인은 왜 이성이라는 무기로 싸우지 않는가’란 화두를 던진 인터뷰에서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면, 그래서 체념하고 소극적으로 처신하면 최악의 결과가 닥치는 걸 자초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을 주역은 국민이고, 국민의 지혜로 현실을 바꿔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대선 후보 못지않게 국민들도 더욱더 공부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 그래야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하는 발언에도 당당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될 둥 말 둥 한 데,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가는 우리도 모르게 ‘지식 기술자’의 꾐에 넘어갈 수 있다. 경계해야 한다. key66@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