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꽃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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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로(1958~)

꽃의 죽음은 색을 버리는 일

색이 꽃이었는데 꽃이 색을 버리다니

푸른 잎 껴안았던 용머리도

붉은 꿩의비름도 보랏빛 초롱꽃도

색을 버린 후 꽃을 접었다

색으로 꽃을 썼다가

색을 보내고 꽃이 진다

꽃이 색이었고 색이 꽃이었으나

꽃과 색은 덤덤한 작별을 한다

가끔 색을 갖고 낙하하는

철없는 꽃도 있지만

저승 입구 담 모퉁이에서

반성문을 쓰고 있을 게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땅에 떨어진 낯은

색도 꽃도 다 버린 편안한 잠이다

시집 <백 년쯤 홀로 눈에 묻혀도 좋고>(2021) 중에서

모든 생명은 자기만의 색을 가진다. 눈으로 느끼는 시각적 색상 외에 모든 인성도 고유의 색을 가진다. 자기만의 색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뜻하며 남과의 차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만 가졌다고 알아왔던 고유색이 이미 남들도 다 가지고 있는 보편화된 색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화려한 색상 뒤에 숨어있는 진실한 무채색의 의미가 보이게 된다. 생명이 색을 상실하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고 시인은 말하지만 색을 잃고 나서야 생명의 참된 의미가 보이는 것도 깨닫는다. 칼라 화면보다는 흑백 화면으로 본 드라마나 영화의 감동이 더 깊듯이, 깊은 사랑 또한 그 색은 무채색이다. 더 깊어지기 위해 오늘도 꽃은 진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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