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집이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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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라이프부장

지난 설 연휴에 마음 먹고 컴퓨터에 저장된 몇 년치 사진을 정리했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이 하나 있다. “그래! 여기도 갔었지. 거기서 했던 결심을 잊고 있었네”라며 반성하게 된다. 그 사진은 언론재단 해외연수자로 미국에 살 때 보스턴 윌든 호숫가에서 찍은 것이다.

유명한 사상가이자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후 윌든 호숫가에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2년 2개월 동안 밭을 일구며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그의 책 <윌든>에서 받았던 무소유와 자연에 대한 삶은 무척 감명 깊었고, 그가 살았던 오두막 집터에 간 날 앞으로 욕심을 버리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 전 소로 오두막 집터 방문
무소유, 자연 친화 삶 감명받아
즐길 줄 아는 인생 살기로 결심

집 장만, 시세차익에 피폐해진 삶
소유하지 않아도 주인이 될 수 있어
원하는 지역, 원하는 만큼 살아보기


망각이 인간이 가진 축복이라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모습이기도 한 것 같다. 울컥할 정도로 인상적이던 윌든의 통나무집은 지난 몇 년간 내 마음에서 사라졌다. 다른 지역에 비해 덜 오른 아파트 가격이 안타까웠고, 무리해서라도 유망지역으로 이사했다면 지금 재테크 상황이 아주 좋을텐데라는 후회가 괴롭혔다.

주변에선 ‘영끌’해서라도 집을 산 이들은 승자고, 집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은 ‘벼락 거지’가 된 무력감을 토로한다. 대통령 후보들의 주요 공약은 집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서민들에게 집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잘 알고, 영끌해서라도 집을 마련하겠다는 마음도 이해한다. 그러나 최근 집 소유를 다르게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즐겨 보는 유튜브 콘텐츠가 있다. 40대 초반의 부부가 아파트를 팔고 집 없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 달씩 살아보는 내용이다. 이들은 집을 버리고 나니 인생이 훨씬 간단하고 즐거워졌다고 이야기한다. 떠나기 전 아파트를 가득 채운 비싼 가전제품들과 가구, 각종 짐을 모두 중고마켓에서 정리한다. 집값 상승이 기대되는 지역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오직 차 한 대에 들어갈 정도의 꼭 필요한 생활용품, 옷가지만을 싣고 여행하듯 삶을 산다.

이 부부가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는 건 아니다. 집을 판 돈으로 유망한 주식에 투자하고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며 경제적인 활동도 이어간다. 맛집도 다니고 여가도 즐기며 동시에 그들만의 재태크도 열심히 한다. 이 부부가 택한 삶의 방식을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중년의 부부가 자가든 임대든 고정된 집이 없어도 삶이 괜찮다는 발상이 좋았다.

얼마 전 읽은 소설에선 영끌해서 집은 산 이들이 맞닥뜨린 팍팍한 삶이 나온다. 집에 목매느라 가족에게 소홀하고, 나보다 나은 집에 사는 타인을 질투하며 주인공은 피폐해진다. 대출이자를 갚기 위한 삶에서 자신이 집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집이 자신들을 소유한 것 같다고 느낀다. 가족의 불행 앞에 무너지는 ‘내 집’의 안락함은 집의 평수, 시세 차익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한편에선 유사 이래 처음이라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사람들에게 주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깨닫게 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일과 집은 분리되지 않았고, 도보 생활권이 표준이었다. 산업혁명은 이 모델을 뒤흔들었다. 물류비용을 고려해 집과 먼 외부에 대형공장을 지었고 직주(직장·주거)분리가 시작되었다. 한국은 압축성장의 상징국가답게 단기간에 직주분리가 발생했다. 출퇴근에 1~2시간을 쓰면서 생활의 질은 악화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는 그동안 당연시했던 직주분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출퇴근을 안 해도 일이 가능해졌다. 통근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IT발달로 공간의 제약에서 거의 벗어날 수 있었다.

직주분리와 개인의 행복추구가치가 만나며 이제 다거점생활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집을 소유하지 않고 원하는 지역에서 원하는 만큼 살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고정된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도, 자신이 선택한 지역에서 일과 삶, 여가까지 즐겁게 만끽한다. 원하는 만큼 살고 또 다른 지역으로, 국가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일본에는 다거점 플랫폼 업체가 급속하게 성장 중이다. 최근 한국도 여러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는 집구독 서비스가 등장했다. 업체는 각 지역의 빈집을 개조해 회원들의 예약을 받아 원하는 기간만큼 살 수 있게 한다. 현재 남해와 제주에 몇 개 집이 있고 앞으로 지역들이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집 구독 서비스는 지방 소도시 빈집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지역 활성화 효과까지 기대된다.

소유한 자가 주인이 아니라 즐기는 자가 주인이라는 말이 있다. 삶의 방식과 집에 대한 관점을 조금 바꾸면 전 세계 어느 곳이라도 당신의 집이 생길 수 있다.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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