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문학평론가, 고석규는 상처받은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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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규 평전’ 출간 남송우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고석규는 ‘파아란 상화(傷花, 상처받은 꽃)’(윤동주 시구)였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끝의 끝’ ‘절망의 끝’을 보아버렸다. ‘마음 드디어 견딜 수 없음’으로 인해 판잣집 벽을 에워싼 4000여 권 형이상학의 성채에 유폐된 채 릴케와 윤동주를 통해 ‘자의식 충만한 황홀증’과 ‘예술을 위한 예술’을 향했는데 그 끝에 죽음이 놓여 있는 그런 길을 갔다. ‘파아란 상화’는 너무 여렸기 때문에 결국 피어나지 못한 거였다. 비평가 김윤식 선생이 고석규를 그렇게 봤다.”

부경대 명예교수인 남송우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이 (국학자료원)을 출간했다. 이정표를 세운 지역의 주요 문인에 대한 첫 평전이다. 부산 문단의 추문 중 하나는 주요 문인에 대한 평전이 없다는 거다. 은 그 공백 메우기의 시도이자 그 공백에 대한 문제 제기다.

1932년 함경도 함흥 출신
한국전쟁 때 부산에 피란
전방위적·열정적 문학 활동
한국문학 이끌 실력도 갖춰
본격 ‘윤동주론’ 최초 집필
부산대 국문학과 석사 1호

-고석규는 누구인가.

“1932년 함남 함흥 출생인 고석규는 한국전쟁 때 부산에 피란 왔다가 1958년 26세로 요절한 문학평론가다. 1950년대 한국 전후문학 비평 감수성의 발견과 그 전개의 역사는 고석규를 기점으로 한다.” 그런데 요절한 거였다. 얄궂게도 추영수 시인과 결혼한 1년 뒤였다. 더욱이 그가 죽은 19일 뒤에 유복녀 고명진(금속공예가)이 태어났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엇갈렸다.



-평전에 자료 제시가 많은 거 같다.

“고석규는 살별(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기에 방증 자료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추영수 시인에게 남긴 편지와 딸의 도움으로 자료를 좀 더 수합할 수 있었다. 그 자료들 속에서 살별의 아스라한 흔적을 좇으려 했다.” 또, 안타깝게 평전이 나오기 직전인 지난 1월 5일 추 시인은 85세로 작고했다고 한다.



-새롭게 드러난 것은.

“한국전쟁 때 고석규가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기를 통해 처음에는 가족들과 함께 피란했다가 도중에 헤어졌다는 사실을 새로이 밝혔다. 그의 첫사랑 ‘영(羚)’도 함께 피난했는데 역시 피란 도중에 헤어졌다.” 고석규에게는 그의 마음이 가닿은 뮤즈들이 있었다. 기록에서 그는 영, 누나, 미스 손, 엘리아, 어머니를 뜨겁게 호명한다. 뮤즈에 대한 갈망은 결국 부인 추영수 시인에게 도달했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어야 전 인류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는 ‘태초의 비밀’을 품은 것이 뮤즈였다.



-고석규는 어떤 사람이었나.

“전방위적이고 열정적인 문학 활동을 펼친 그는 한국문학을 이끌 야심을 품고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빼어난 아카데미’였던 고석규는 1934년생 이어령 선생의 수준을 능가한다는 말도 있었다. 고석규는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읊조리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하루에 책 한 권을 읽어내는 정력가였고, 무엇이든 한 번 마음에 들면 미쳐버리는 성격이었다.

결혼 후 거의 밤을 새워가며 글을 썼는데 ‘그때 방문을 열고 들어가 쉬도록 해야 했었다’는 게 추영수 시인의 후회였다.” 고석규는 1957년 ‘시인의 역설’이란 글로 한국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했으며, 1958년 부산대 국문학과 최초의 석사학위 취득자였다. 바로 그해에 요절했다.

남송우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은 “고석규는 한국 최초의 본격 윤동주론을 썼고, 당시 한국문학 최고 수준의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며 “그처럼 삶을 모두 내던져 문학을 사랑한 이는 찾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 문학정신을 이으려 지난해 고석규비평문학관을 개관했고, 이번에 평전을 냈다는 거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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