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광이 압도하는 암자, 계절이 비켜가는 한옥 -구례 사성암· 쌍산재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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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깎아 만든 1500년 된 고찰, 4대 고승 수행한 곳, 빼어난 풍경 절로 성불할 듯
TV프로그램 ‘윤스테이’ 촬영, 차 마시고 숲길 거닐고 고택 탐방,
도토리 마르는 풍경 계절 잊은 듯

도를 깨우친 고승의 마음처럼 시원한 풍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암자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다른 분위기로 유명한 한옥 고택도 있다. 둘 다 전남 구례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춥고 황량한 겨울의 어깨 너머로 봄의 희미한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먼 길을 마다않고 차를 몰았다.


전남 구례 쌍산재. 전남 구례 쌍산재.

■사성암

가파른 오르막길이 주차장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발걸음을 요구하는 게 분명하다. 그나마 겨울이기 망정이지 여름이라면 땀깨나 흘려야 할 것 같다. 가쁜 숨을 몰아쉴 각오를 하고 오르막길에 첫 걸음을 내디딘다. 다행히 오르막길 거리는 그다지 길지 않다. 10분 정도만 헉헉거리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오르막길 막바지 부근에서 허리를 펴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온다. 가슴은 시원하게 탁 트이고 눈은 깔끔하게 맑아지는 상쾌한 기분이다. 이런 절경이 이렇게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니!


사성암에서 내려다본 구례 전경. 사성암에서 내려다본 구례 전경.

사성암은 오산 정상 부근의 바위를 깎아 만든 암자다. 544년에 지었다고 하니 벌써 1500년이나 된 고찰이다. 원래 이름은 오산사였지만 의상대사, 원효대사, 진각국사, 도선국사가 수행한 곳이라고 해서 사성암으로 바뀌었다. 4대 고승이 차례로 찾아와 수행을 했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나고 정신수양에 좋은 기운이 흘러넘치는 곳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걸어 다니다 보면 섬진강과 주변 평야 그리고 연이은 지리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다시 암자 쪽으로 몸을 돌린다. 바위에 깊게 틀어박힌 유리광전과 53불전·나한전이 눈길을 확 잡아당긴다. 가파른 바윗길을 이용하면 두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유리광전을 먼저 올라간 뒤 53불전·나한전을 둘러보는 게 일반적인 순서다.


유리광전(오른쪽)과 53불전·나한전. 유리광전(오른쪽)과 53불전·나한전.

마애여래입상을 모신 것으로 유명한 유리광전은 사성암의 주 불전이다. 전설에 따르면 높이 3.9m인 마애여래입상은 마음이 경지에 이른 지경을 일컫는 선정바라밀에 든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그렸다. 유리광전에서는 예불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나이가 지긋한 두 신도가 눈을 감고 합장한 채 마애여래입상을 향해 앉아 있다.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뒷모습에서도 간절한 심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두 사람은 무엇을 저리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는 것일까.


유리광전 안의 마애여래입상. 유리광전 안의 마애여래입상.

53불전·나한전은 이상적인 불국토인 화엄세계의 53불과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500나한을 함께 모신 곳이다. 53불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인데 그 중 20불은 훼손이 심해 최근에 새로 제작했다.

53불전·나한전 뒤편 산길로 돌아가면 많은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은 소원바위와 산왕전, 도선굴이 나타난다. 소원바위는 부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여기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꼭 이뤄진다는 속설이 전해지기 때문에 소원 카드를 매다는 줄에는 수많은 기원이 매달려 있다. ‘딸을 꼭 낳게 해 달라’,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달라’, ‘올해는 꼭 취업 성취’ 같은 현실적인 소원에서부터 성불을 바라는 이상적인 기도에 이르기까지 사연은 다양하다.


사성암 소원바위. 사성암 소원바위.

하얀 수염을 길게 휘날리는 노인 탱화가 붙은 작은 건물이 보인다. 소원을 들어주는 산왕을 모신 산왕전이다. 바로 옆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동굴인 도선굴이 있다.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고 해서 도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동굴 안에는 많은 사람이 소원을 빌면서 켜놓은 초들이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무슨 내용을 빌었는지는 비밀이다.


사성암 도선굴. 사성암 도선굴.

사실 사성암에서 풍경이 가장 빼어난 곳은 바로 산왕전 일대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구례의 경치는 암자로 올라오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시원하고 아름답다. 거의 일직선처럼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이곳에서 섬진강 너머 화엄사, 천은사 등 고찰은 물론 산수유마을에 활짝 핀 노란 산수유 꽃의 흔적까지 볼 수 있다. 경치에 넋을 잃은 기자를 보면서 산왕전을 찾은 한 아주머니가 빙긋이 웃으며 한마디를 건넨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며칠 묵어가기만 하면 저절로 성불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명당입니다.”


소원바위 인근에서 내려다본 구례 전경. 소원바위 인근에서 내려다본 구례 전경.

■쌍산재

제법 쌀쌀한 날씨 탓에 온몸이 싸늘하다.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리운 시간이다. 다행히 사성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훌륭한 한옥을 둘러보며 커피나 유자차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TV 프로그램 ‘윤스테이’에 등장해 큰 화제를 불러 모은 쌍산재가 바로 그곳이다.

쌍산재에는 사성암만큼이나 내방객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 입구에 직원이 앉아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이행하고 있다. 방역패스를 확인하거나 전화를 걸고 체온까지 재도록 친절하게 안내한다. 단순히 이곳을 둘러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굳이 숙박하지 않아도 된다. 입장료 1만 원을 내면 커피나 유자차 등을 마시면서 내부를 살펴볼 수 있다.


전남 구례 쌍산재 안채와 사랑채 일대. 전남 구례 쌍산재 안채와 사랑채 일대.

정문을 지나 쌍산재에 들어간다. 관리동에서 입장료를 내고 유자차를 주문한다. 맞은편에는 ‘윤스테이’에서 봤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넓은 마당이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고, 주변에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각 건물의 마루에 자리를 잡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마시는 내방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쌍산재 별채와 죽노차밭 숲길. 쌍산재 별채와 죽노차밭 숲길.

이곳에서만 차를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차를 들고 다른 건물로 갈 수도 있다. 관리동 뒤로 이어지는 죽노차밭 숲길이 그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다. 숲길을 따라가면 절벽에 자리를 잡아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의 풍경을 즐기는 곳에나 어울릴 만한 누각처럼 보이는 별채가 나타난다. 조금만 더 지나면 호서정이 나온다. 두 곳의 마루에도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소반이 차려져 있고 방석이 깔려 있다.


쌍산재 호서정. 쌍산재 호서정.

호서정에 유자차 잔을 놓고 앉는다. 바로 앞은 꽤 오래 전부터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대나무 밭이다. 마침 제법 거칠게 바람이 분다. 바람에 휘날린 대나무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사각거린다. 호서정은 앞으로는 대나무 밭, 뒤로는 나지막한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여기에 유자차의 따뜻한 온기가 주위를 데우고 있어 사성암에서 느꼈던 한기는 어느 새 몸에서 빠져나가버렸다.


쌍산재 경암당. 쌍산재 경암당.

호서정 뒤로 더 올라가면 너른 잔디밭이 나온다. 그 뒤에는 다시 건물 두 채가 더 보인다. 경암당과 ‘쌍산재’라는 간판을 단 서당채다. 두 곳에서도 차를 마실 수 있다. 경암당 옆에는 쌍산재의 뒷문처럼 쓰이는 쪽문인 영벽문이 나온다. 문 밖으로 나가면 작은 사도 저수지가 나타난다. 길지는 않지만 아담한 둑방길이 조성돼 있어 간단하게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구례 곳곳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한두 곳이 아니다. 예로부터 농사를 풍족하게 지었던 곳이라는 점을 잘 알려주는 증거다.



서당채인 쌍산재. 서당채인 쌍산재.

다 마신 유자차 잔을 관리동에 돌려주고 잠시 쌍산재 마당을 둘러본다. 관리동 처마 끝에 매달린 곶감은 눈부신 햇살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맞은편 사랑채 처마에는 마늘과 시래기 메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안채 부엌 앞에는 지난 가을 산에서 주워온 도토리가 바삭거리며 말라가고 있다. 세상의 계절은 겨울을 지나 봄을 향해 가고 있는데 쌍산재에서는 아직도 가을이라는 녀석이 햇살을 쬐고 있는 모양이다.


쌍산재 처마에 매달린 마늘과 씨래기, 메주. 쌍산재 처마에 매달린 마늘과 씨래기, 메주.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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