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그레이스 켈리, 미국 여배우에서 모나코 왕비로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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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모나코] 그레이스 켈리


1955년 4월 30일,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미국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프랑스 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칸 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이전에도 영화제에 참석하느라 칸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켈리는 칸에 머무는 동안 기대 이상의 만족을 느꼈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어느 여배우들보다 자신에 대한 팬들의 성원이 더 뜨거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로 사인 공세가 집중적으로 몰렸고, 신문사 사진기자들의 플래시도 여느 해보다 많이 터졌다.


모나코 왕궁 모나코 왕궁

■왕궁의 초대


켈리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모나코 왕궁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왕궁에서 열리는 사진 촬영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게 초청장의 내용이었다. 칸에서 모나코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켈리는 어차피 칸에 있어봐야 호텔 아니면 행사장 외에는 갈 데가 없다는 생각에 바람이나 쐬자며 모나코 왕궁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왕궁에서는 국왕 레이니어 3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촬영 행사를 마친 뒤 열린 만찬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켈리처럼 레이니어 국왕도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레이니어 국왕은 조용한 목소리로 켈리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조만간 미국에 갈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 켈리 양을 한 번 만나 뵙고 싶군요. 댁에 찾아가도 될까요?”

“그렇게 하신다면 제가 영광이지요. 언제든 마음 편하게 찾아오세요.”

“그렇다면 미국에 갔을 때 연락드릴 전화번호를 켈리 양 매니저로부터 하나 받도록 하겠습니다.”

켈리는 프랑스산 고급 포도주가 든 유리잔을 들어 레이니어 국왕의 잔에 부딪치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냥 지나가는 인사말이겠지’ 했다. 설마 모나코 국왕이 미국에까지 자신을 찾아오겠느냐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세계의 신문들이 세기의 만남이라며 떠들겠군. 재미있는 사람이야’라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영화 ‘하이 눈’에 출연한 그레이스 켈리. 영화 ‘하이 눈’에 출연한 그레이스 켈리.

하지만 이 생각은 켈리의 착각이었다. 레이니어 국왕이 그녀를 모나코 왕궁으로 초대한 것은 사실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결혼을 서둘러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기왕 결혼할 바에야 작은 나라인 모나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릴만한 여자와 결혼해야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레이니어 국왕이 원하는 조건에 가장 어울리는 여자는 바로 세계적 여배우인 켈리였다. 비록 그녀가 오몽은 물론 캐리 그랜트, 개리 쿠퍼 등 유명한 남자 배우들과 염문을 뿌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에게 그런 소문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사진 촬영이라는 핑계를 붙여 그녀를 모나코로 초대한 것이었다. 자신도 켈리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또 왕가 사람들에게도 소개해 자신의 신붓감으로 괜찮은지를 평가받아보자는 게 숨겨진 이유였다.

사실 레이니어 국왕에게는 왕세자 시절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프랑스 여배우 지젤 파스칼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동거를 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의사가 ‘파스칼은 불임’이라고 진단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왕세자비가 아기를 낳지 못할 경우 왕세자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게 모나코 왕가의 규정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이 진단은 엉터리였음이 밝혀졌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애를 낳았기 때문이다.


모로코 몬테 카를로 전경. 모로코 몬테 카를로 전경.

■국왕의 청혼


켈리가 모나코를 방문하고 6개월 정도가 지난 그해 11월 레이니어 국왕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모나코 왕궁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방미 이유는 여행이었다. 미국에서는 당시 32세이던 그가 왕비를 구하러 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그가 뉴욕에 도착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결혼 대상으로 어떤 여자를 찾고 계신가요?”

레이니어 국왕은 껄껄 웃었다.

“글쎄요. 최고의 여자?”

레이니어 국왕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호텔에 여장을 푼 뒤 바로 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마음을 굳힌 처지여서 굳이 탐색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켈리 양, 저를 기억하시나요? 모나코의 국왕 레이니어 3세입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계셨나요?”

“일전에 모나코에 오셨을 때 제가 말씀드렸죠. 미국에 찾아오겠다고요. 지금 여기는 뉴욕이랍니다. 내일 켈리 양과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도 될까요?”

켈리는 깜짝 놀랐다. 그가 정말 미국까지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엉거주춤하다 편하게 오시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다음날 레이니어 국왕은 수행원 몇 명만 거느린 채 조용히 켈리의 집을 방문해 그녀와 부모를 만났다.

필라델피아 출신인 켈리의 집안은 나름대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존 브랜든 켈리는 올림픽에 출전해 조정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낸 운동 선수였다. 나중에 이스트 코스트 시장 선거에 나섰다 불과 몇 표 차로 떨어졌지만,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체육국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어머니 마가렛 메이저는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뒤 모델로 활동했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다.


그레이스 켈리와 레이니어 3세. 그레이스 켈리와 레이니어 3세.

켈리 가족은 먼 곳에서 찾아온 레이니어 국왕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모나코 왕궁에서 드는 식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식탁이었지만, 그들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만찬이었다. 다행히 레이니어 국왕도 음식이 마음에 드는지 정말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던 레이니어 국왕은 입을 열었다.

“먼 유럽에서 찾아온 작은 나라의 국왕을 이렇게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제가 찾아온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제가 모나코의 국왕이니, 켈리 양은 모나코의 국모가 되는 셈이지요.”

레이니어 국왕의 예상치 못한 폭탄선언에 켈리는 물론 부모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저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그는 사흘 뒤 정식 청혼반지를 갖고 다시 오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레니이어 국왕이 돌아간 뒤 켈리의 가족은 회의를 열었다. 부모는 물론 언니 마가렛, 오빠 존, 여동생 엘리자베스도 참석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끝에 켈리의 미래를 위해 결혼을 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이니어 국왕은 사흘 뒤 다시 켈리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청혼 반지를 꺼냈다. 켈리는 주저하지 않고 정중하게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평소 칼릴 지브란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사랑했던 시 구절은 이렇다.

‘사랑이 너를 부를 때 그를 따라 가거라

비록 그의 목소리가 네 꿈을 흩어버릴지라도.’

우연의 일치인지 모나코에서 레이니어 국왕을 만나고 미국으로 돌아간 켈리는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백조’에서는 유럽 왕국의 공주 역할을 맡았다. 또 ‘하이 소사이어티’에서는 결혼반지를 손가락에 끼기도 했다. 그녀는 또 레이니어 국왕이 청혼하기 며칠 전 2달러 지폐를 선물로 받았다. 이 이야기가 퍼지는 바람에 이후 미국에서는 2달러 지폐가 행운의 상징이 됐다고 한다.


모나코 항구 전경. 모나코 항구 전경.

■세기의 결혼식


켈리는 가족과 함께 이듬해 4월 4일 뉴욕항 84번 부두에서 대서양 정기선 SS 컨스티튜션 호를 타고 모나코로 향했다. 뉴욕항에는 수천 명의 팬들이 몰려나와 눈물로 켈리를 떠나보냈다. 켈리 가족이 가지고 간 가방만 80개였다고 한다. 8일간의 항해 끝에 켈리 일행이 모나코에 도착하자, 시민 2만여 명이 도로에 나와 켈리를 환영했다.

4월 18일 모나코 왕궁에서 시민 등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법적 결혼식이 열렸다. 그녀의 가족이 모나코 왕가에 결혼식 지참금으로 전달한 돈은 무려 200만 달러였다고 전해진다. 다음날에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종교적 결혼식이 다시 치러졌다. 이 결혼식은 전 세계 주요국가에 TV로 생중계돼 무려 3000만 명이 지켜봤다.


모나코 왕궁의 야경. 모나코 왕궁의 야경.

두 사람의 결혼 이유에 대해 이탈리아의 문학주간지 레스프레소는 특이한 내용을 주장하는 기사를 썼다.

‘레이니에 3세가 켈리와 결혼한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왕의 부친인 포리그나 공이 프랑스 당국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아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했다. 프랑스의 백만장자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재산을 세금 피난처인 모나코로 빼돌렸다. 프랑스 정부는 예금을 환수하는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 이를 눈치 챈 포리그나 공은 아들과 미국 최고 여배우를 결혼시킴으로써 미국이 모나코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프랑스가 미국 여론을 의식해 모나코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주장도 나왔다.

‘1918년 프랑스-모나코 조약에 따라 모나코 왕이 후사를 얻지 못하면 모나코는 프랑스에 귀속된다. 이 때문에 레이니어 3세는 서둘러 켈리와 결혼한 것이다.’

켈리는 결혼을 하고도 영화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1962년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이 영화 출연을 제의하자, 받아들일 뜻을 비쳤다. 이에 대해 모나코 국민들 사이에서 반대 목소리가 커졌다.

“모나코의 왕비가 천한 오락영화에 출연한다면 나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국민들을 망신시키는 것이다.”

켈리는 결국 영화 출연을 포기했다. 그녀는 198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아들 앨버트와 딸 캐롤라인, 스테파니를 낳았다. 레이니어 국왕은 아내를 잃은 뒤 영화배우였다가 보석상으로 변신한 사촌과 염문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모나코의 카지노. 모나코의 카지노.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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