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생각의 기척] 경멸의 눈길에 대하여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예술철학자

그려진 장면만큼은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을 테다. 모래 함정 같은 곳으로부터 내민 개의 주둥이가 오른쪽을 향해 약간 위쪽으로 뭔가를 응시하고 있으나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최근의 연구 결과 날갯짓을 하는 두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것 역시 거기에 무한한 공간과 무(無)만 있을 따름이라는 걸 바꾸지 못한다. 이러하니 내가 한 달여 전에 창고 안으로 옮겨 간 스페인 화가 고야의 그림 ‘개’는 압도적인 비주얼과 의미론적 수수께끼(혹은 미궁) 사이의 대비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 속에 의미론적 요소, 즉 롤랑 바르트의 용어로는 의미를 고정시키는 ‘정박(ancrage)’의 요소가 인색하게도 개의 주둥이와 절망적인 눈길이라고 하는 일화(逸話)밖에 없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적인 행동을 보여 주는 개의 절망적 눈길이 당시 스페인의 계몽된 민중에게 밀어닥친 처지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나아가 200년 후 마찬가지로 정치적 반동과 반지성의 대선 결과를 받아든 대한민국 일부 민중의 곤혹스러운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데 말이다. 그런데, 고야가 이렇게 절망적인 눈길을 그림으로 남겨 놓은 건 아주 예외적이다. 오히려, 그가 수많은 판화와 데생에다가 그려 넣은 것은 이와는 다른 시선과 태도, 그러니까 경멸의 그것들이다.

스페인 화가 고야의 그림에 숨은 시선처럼
의롭지만 힘이 없는 약자의 유일한 수단
불의한 강자에게 굴복하지 않는 마음가짐

이순신은 선조의 치졸한 처사를 놓고 속으로 어떤 심적 반응을 보였을까. 예루살렘에서 하인리히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던 한나 아렌트의 내면에는 악의 평범함 외에 어떤 감정 구조가 솟구쳤을까. 무릇 세상의 모든 의로운 핍박 받는 자들은 자신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불의로운 권력자에게 속으로 어떤 눈길을 보낼까. 틀림없이, 경멸의 눈길일 것이다. 의로우나 힘이 없는 약자들이 불의로운 강자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감성 구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대처하는 유일한 방식의 마음가짐이 바로 경멸이지 않을까.

고야의 많은 그림들은 바로 이 경멸이라는 감성 구조에 대한 회화적 탐구다. 그리고 그의 경멸적 시선은 당대 스페인의 많은 군중에게로 향한다. 군주제 아래에서도, 명색이 데모크라시(‘민주주의’로 오역되어 널리 쓰이고 있으나 ‘민중정’이 올바른 번역이다)라고 하는 지금의 정치체제 하에서도 오로지 자신의 사적 출세와 이익만을 좇기에 시민으로서의 공적 책임감 따위는 가볍게 차버리는 뭇 군중들은 있기 마련.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박정희 혼자서 세운 게 아니다. 그에게 지지의 표를 던진 수많은 군중이 있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도 혼자이지 않았다.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추종한 무수한 군중이 있었다. 오로지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지성마저 깨부수려 했던 프랑코 역시 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내외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후원하고 동맹을 맺은 다양한 세력들이 있었다. 전두환과 이명박과 박근혜에게도 자발적, 열광적으로 지지하며 추종한 아주 많은 군중이 있었다.

어떤 행동이건 그걸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들은 한 표를 찍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손가락을 자르는 것으로 후회의 감정을 표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또다시 흘러 이번 대선의 승자 역시 혼자이지 않았다. 또다시,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한 표를 던져 줬다. 우리가 조만간에 여기저기에서 잘린 손가락을 보게 되는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벌써 자신들의 투표 행각에 대한 핑곗거리를 찾아 놓았을 테니까.

대한민국 사회에서 경멸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기란 쉽지 않다. 가식적인 인간관계와 이해타산적인 사회자본의 확충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하고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고 하는, 가짜로 착하고 진짜로 어리석은 사회에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금기 사항에 해당한다. 그러나 고야가 검은 그림들을 그린 지 200년이 지난 후, 더욱이 반문명적인 대선 결과를 접한 다음이니만큼 고야가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대선 결과를 초래한 뭇 군중들에게 경멸의 감성을 보내고자 한다. 그들이 받을 자격이 있는 감정은 애정도 존경도 아니고 바로 경멸이니까.

그대들에게도 이런 게 있다면, 안녕하신가 그대들의 영혼이여. 아파트값과 주가로 알뜰살뜰 배려했을 당신네 영혼은 건재하신가. 영혼의 세탁소도 잘 작동하고 있는가. 당신네 영혼의 측정 단위는 얼마나 정의로운가가 아니고 얼마나 배부른가였지. 아니, 얼마나 두둑한가였던가. 지금도 여전히 그럴 것이고.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